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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칼럼(에드몬튼 지역신문에 게제되는 칼럼입니다)
작성자 admin
작성일 2017-04-25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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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책없는 사람들

주책없는 사람이란 법을 어기지는 않았지만 예의가 없다거나, 상황을 잘 파악을 하지 못한다거나, 그래서 때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때에 맞는 말이나 행동’이라는 것을 에티켓이라고 말을 한다. 예의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살면서 서로 간에 정해 놓은 보이지 않는 원칙이다. 이 에티켓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게 피해나 혐오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것은 어긴다고 체포되어 감옥에 가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받게 된다. 그리고 주책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다. 따돌림을 받으면 존경도 없다. 그러므로 주책없는 사람들은 늘 무시되고 소외되기 마련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 같이 지내기 싫어한다. 주책없기 때문이다.

유대 관원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이 한가할 것 같은 시간에 예수님을 찾았다. 지금 같은 시대라면 아마 미리 전화를 하고 약속을 하고 자리를 마련하고 해서 예수님을 찾았을 것이다. 그는 주책없는 사람이 아니다. 나름 최선의 예의를 지키며 예수님을 찾아 왔고 정중하게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중에는 니고데모와 같이 예의범절이 있는 사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즉 주책없는 사람들이다. 그 주책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는데 그것도 주책없는 방법으로 찾았다.

소경되어 길에서 구걸하던 바디메오는 주책없는 방법으로 예수님을 불러댔다. 길에 가시는 예수님을 불러댔다. 많은 군중에 쌓여 한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불러댔다. 제자들과 사람들이 만류하는데도 불러댔다. 예수님은 소경 바디메오의 외침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그를 부르셨다. 그래서 그는 고침을 받았다.

바리새인이며 문둥이었던 시몬은 예수님을 정중하게 자기 집에 초대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의 발에 키스를 하며 옥합을 깨어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것이다. 그 집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난감한 일이 있는가 하며 쳐다만 보고 있을 때 마리아는 자기가 예수님께 하고 싶은 일을 다 했다. 모든 사람이 마리아가 주책없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주책없는 방법으로 예수님께 접근했다. 그러나 거기 모인 많은 사람들 중에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마리아였고, 칭찬을 받은 것도 마리아였고, 사 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사람도 마리아였다. 예수님을 잔치에 초대한 사람에 대해 다른 복음서에서는 ‘한 바리새인’이라고만 기록하였으나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전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수로보니게니아 지방에 사는 이방 여인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 로 자처하면서 예수님께 다가갔다. 어떤 사람들은 지붕을 뚫고 자기 병든 친구를 내려 예수님을 만나게 했고, 어떤 여인은 피를 흘리는 부정한 몸으로 다른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되는데,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병이 나을 것 같아서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삭개오는 작은 키로 인해 지나가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자신의 체면 같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길가의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겠다고 하셨고 그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사려 깊은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야 할 만남’으로 만난 예는 거의 없다. 주책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예수님의 응답하심을 받았다. 많은 세상적 교육은 우리를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우리 안에 있는 ‘거절감’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더욱 사려 깊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채찍질한다.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런 사려 깊은 사람이 되게 하려고 노력하며 산다. 자기 아내나 아이들이나 자기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이다. 에티켓에  너무나 충만한 사람이 되어서 그런 주책없는 사람같이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힘든 사람이 되어 버렸다.

누가 사려 깊은 사람이 좋다고 말했는가? ‘에티켓’이란 것이 무엇이기에 우리의 진정한 욕구를 표현하는 것조차 우물쭈물하게 만드는 것인가? 남들 앞에 어떤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해서 주님 앞에 적나라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인가? 어떤 생각, 어떤 사고방식, 어떤 가치관, 어떤 사려 깊은 생각이 우리를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가? 자신의 원함을 적당한 때에 표현하지 못하고 살도록 훈련을 받아서 우리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주님을 만나도 우리의 원함을 가지고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제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누가 아주 적나라하게, 주책없게 예수님께 나가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비웃는다.
“저런 주책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그러기에 교회는 주책없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렇게 주책없는 사람들이 넘쳐나기에 말도 많다. 그러할지라도 교회가 주책없는 사람들을 멀리하기 시작하면 예수님도 그 교회를 멀리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강도, 세리, 죄인, 창기들과 같이 주책없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셔서 스스로 거룩하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눈이 무서워 자기에게 오는 자들을 결코 멀리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주님의 성품이며 또한 지금의 교회가 닮아야 할 진정한 교회의 성품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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