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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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1)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란 무엇인가?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4-17)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라는 단어는 기독교 안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기독교가 없고, 기독교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늘 서로 ‘은혜 받으라’ 말하고 또 ‘은혜 받았다’라고 말을 합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하면 기독교를 완전히 이해한 것이고 이 은혜를 모르면 아직 기독교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되면 이 은혜라는 단어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대부분이 들어있는 것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라는 단어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 성경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자비’와 ‘긍휼’이라는 단어를 같이 설명하면 좋습니다. 은혜라는 단어 속에 자비와 긍휼이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말보다 자비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많이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전적인 ‘은혜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씀하십니다(요1:17).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도 계속 자비와 긍휼로 사람들을 대하셨습니다.


‘자비를 얻었다’고 하면 벌을 받아야 하는데 받지 않게 된 것을 말하고, ‘긍휼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복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 복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죄를 지은 사람에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 즉 상관이나 재판관이나 왕, 혹은 피해를 당한 사람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것이고, 긍휼을 베푸는 것은 그렇게 인간적인 연결이 없는 관계일지라도 상황이 좋은 사람이 상황이 나쁜 사람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은혜라는 말을 할 때, 그 의미 안에 이 자비와 긍휼의 의미가 함께 포함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은혜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대하실 때 자비와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데 사면하셨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바로 자비와 긍휼에 기초로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진토임을 아십니다. 연약한 그릇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향하여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으로 일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시78:3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사54:8)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시건만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떠나고 늘 악한 일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시고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분이 나시더라도 그 분을 다 발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여러 번 돌이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벌 받을 백성들이지만 그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비로 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8)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3)


긍휼에 대해서 역시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하십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긍휼히 여깁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는 것은 자녀들이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녀이기 때문에 값없이 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녀의 사이입니다.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났거나 못난 자식일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연약함을 정말로 불쌍히 여깁니다. 부모들의 자식들을 향한 희생이 바로 이 ‘긍휼’, ‘불쌍히 여김’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 자식을 향한 긍휼이 없는 부모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은 안 그러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비와 긍휼입니다. 우리는 늘 죄를 지으며 살고 많은 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분께서 우리를 자비로 대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셔서 우리가 행한 대로만 대접하셨다면 이 땅에 지금까지 숨을 붙이고 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로 대하지 않으신다면 인류의 역사 가운데 노아의 홍수와 같은 일이 수 만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이 진토임을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 자비와 긍휼로 대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2-13)



요한복음 1장에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역의 기초가 바로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은혜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는 말은 구약에서는 그 은혜가 충만하지 않고 미미했다는 말이고, 구약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그림자였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비와 긍휼, 즉 은혜를 베푸신 것은 이제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충만해질 은혜를 미리 잠시 잠시 보여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은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이(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특별히 영생의 문제에 관해서 말입니다. 구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셔서 하실 일을 그림자처럼 이곳저곳에 심으셨다는 말입니다. 아직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지 않으셨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과 같은 모습으로 일하셨습니다.


하나의 그림을 보십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성막에 양을 한 마리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죄인 된 사람이 양의 머리 위에 손을 얹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죄가 양에게 넘어가게 되며 그 양을 죽이면 양은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죽게 됩니다. 양의 죽음으로 죄인의 죄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모형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을 합니다. 구약에 이미 모형으로 보여주셨던 바로 그 분이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자비와 긍휼로 일하셨는데 이것은 앞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하실 일의 동일한 방법으로 일하셨던 것입니다. 사건이 달랐고 재료가 달랐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약에 이미 요모조모로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셨고, 또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일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직 신약성경은 없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약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영생을 위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것이고 구약이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목적은 바로 인간의 영생을 위한 목적이라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히13:8). 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짐승을 잡아서 죽였고,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로서 있으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벨이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노아가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냈으며, 아브라함이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을 때 그 제물은 앞으로 오셔서 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았지만 앞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제물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히브리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예전,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를 할 때는 짐승을 잡아서 죽여 제물로 드렸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몸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렸으므로 다시는 동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지낼 때 그 짐승의 피로도 죄로부터 정결케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의미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짐승의 피는 눈에 보이는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했지만 이제 보이지 않는 성막에 들어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필요로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가능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즉 자비와 긍휼은 구약 전체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이루신 그 놀라운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그 효험을 발휘했고 2000년 후를 사는 우리에게도 그 효험이 발휘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효험이 있습니다.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얻었을 때 우리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게 됩니다. 단순히 감동을 받았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렸다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감정이 움직였다고 은혜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구체적으로 내게 무엇인가가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벌을 받아야 할 죄를 지었는데 그 죄를 사함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자비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죄의 삯을 지불했으니 그 근거로 우리는 죄의 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기도를 누구의 이름으로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원래 받을 자격이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받게 되니 긍휼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얻는데, 즉 은혜를 받는데 인간의 신분과 자격은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은혜는 값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값은 이미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단어에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값없이 거저 얻는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 ‘믿음으로만’ 이라는 말이 늘 쫓아다닙니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우리 쪽에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실 때도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해서 이미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주시거나 우리의 간청함을 들어주실 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값을 지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이미 일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이 주시는 사실에 대한 ‘믿음’으로만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은혜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이 은혜를 우리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일하셨고 그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셨습니다. 성경의 구석구석을 살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성경 구석구석에 은혜의 모습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사건들을 보면서 배우게 됩니다.


구약의 사건들을 통해서 먼저 우리는 은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이 보이면 신약이 보이고, 신약이 보이면 예수님이 보이고, 예수님이 보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케 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데려가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를 참으로 예배하는, 섬기는 자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 전에 누구든지 먼저 이 은혜 속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5-7)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셔서 하신 일은 독생자를 주심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아십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과 하나님께서 보실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 분은 인류 전체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시작과 끝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지금 나의 삶에서 필요한 부분을 기도하며 나갈지라도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사랑입니다. 인류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빛을 쪼이시고 비를 내리십니다. 공기를 이 땅에 주셨는데 공기가 너는 악하니 공기를 안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공기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살이 찢어 졌을 때 악한 사람이라고 아물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창조하셨던 그 법칙 그대로 악한 사람이건 선한 사람이건 그대로 적용을 하십니다. 비가 오는 날 나무 밑으로 피하려 할 때 나무가 너는 악한 사람이니 오지 말라고 말리지 않습니다. 홍수를 피해 바위위로 피하려 할 때 바위가 너는 악하니 내 바위위에 오르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을 그렇게 동일하게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시는 것이 있으십니다. 인간 쪽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사랑으로 주시려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


성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성품은 사랑이시지만 이 땅을 위한 사역은 예수님을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품이 사랑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서로 사랑하자 합니다. 남을 사랑하고, 이웃을 구제하고, 인류를 사랑하며 살자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신 것을 기뻐합니다. 이 땅에 커다란 선물을 주셨다고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을 선물을 주고 나는 날로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 서로 기쁨을 나누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병도 고치고 마음도 고칩니다. 기도하여 많은 응답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부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필요를 위해 믿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의 끝인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데’까지 가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을 때 말씀의 중간에 멈춰 서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독생자를 주신 곳에 멈춰서도 안 됩니다. 믿음의 세계에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가야 합니다. 믿고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데 까지 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생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그 목적은 바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 많은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인생 최대의 복과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영생을 얻었는지 아니면 영생을 얻지 못했는지 입니다. 우리 쪽의 귀한 것이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귀하게 보시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향해 최대의 은혜를 베푸신 것이 바로 영생을 얻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땅에서 유용한 좋은 것을 많이 주셨을지라도 영생을 얻지 못하면 우리 인생은 결국은 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사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대부분 세상에서 물질적으로 마음으로 풍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성품이 사랑의 성품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게 됩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은 물질의 축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기도 하고, 사랑의 봉사를 하며, 물질과 마음으로 세상을 섬기며 사랑을 나눕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려하고, 사람과 사람이 화목한 사회로 바꾸려 노력합니다. 선교를 가는 사람들에게 많은 물질을 쥐어 주어 가난한 나라에 조금이지만 물질의 부요함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선진의 문명의 혜택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온전한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성품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인데,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야 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영생에 대한 문제입니다. 먼저 믿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영생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요6:40)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구약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또 그 증거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몇몇 가지 사건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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