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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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19) 그가 찔림은...

그가 찔림은...


하와이 코나에 있을 때, 필리핀으로 선교여행을 가면서 아주 짧은 무언극(skit, mime)을 준비했습니다. 네 사람이 필요한 무언극이었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가끔 저의 아이들도 참여를 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한 사람은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 다닙니다. 한 사람은 눈이 멀어 더듬고 다닙니다. 한 사람은 손이 말라 비틀어져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대 위로 등장을 하면서 손이 비틀어져 있는 사람의 손을 만집니다. 그러면 손이 비틀어져 있는 사람의 손이 펴지면서 예수님의 손이 비틀어집니다. 예수님이 다리를 절룩이는 사람의 다리를 만집니다. 그러면 다리를 절룩이던 사람이 똑바로 걷게 되면서 예수님이 다리를 절룩입니다. 예수님이 눈이 먼 사람의 눈을 만집니다. 그러면 눈 먼 사람이 보게 되고 예수님이 눈이 앞을 못 보게 됩니다. 온전케 된 사람들은 기뻐하고 예수님은 구부러진 손에 저는 다리로 더듬거리며 무대를 퇴장합니다.


짧은 극입니다. 약 5분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극 속에 복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은혜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가지고 가셨고, 우리의 아픔을 가지고 가셨다는 메시지이며, 이에 더불어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죄 역시 그런 방식으로 가져가셨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신 가지시고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셨다는 메시지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서 이 의미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근거로 사역하셨는지를 알게 해 줍니다. 그 옛날 이사야는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미 성경에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남은 것은 허물과 죄, 그리고 파괴된 관계와 몸과 마음의 상처들입니다. 이 네 가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지 않았어야 할 ‘것’들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때는 없었던 것들입니다. 연약한 인간들에게 허물이 생겼고, 욕심이 들어옴으로 죄가 함께 들어왔습니다. 아름답던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끼리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없었어야 할 갖가지 병들로 인해 육신에 병이 들고 파괴된 관계로 인해 마음의 상처들이 생겼습니다.


허물이란(transgressions, fault, mistake)이란 잘못 저지른 실수를 말합니다. 부지중에 짓는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허물도 죄로 포함이 되지만 죄라고 말하지 않고 허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물은 부지중에 짓는 죄, 무의식적으로 지은 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해를 입히게 된 것입니다. 일부러 남을 해했으면 죄이지만 고의적으로 남을 해한 것이 아니라 실수로 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실수로 인해 남에게 육신적으로 해를 입혔고, 관계를 파괴했고, 마음에 상처를 준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죄도 많지만 허물도 참 많이 있습니다.


레위기 4장에서는 죄를 위해 속죄제사(Sin offering)를 드리고, 5장에서는 허물을 위해 속건제사(Trespass offering)를 드립니다. 5장 1절에 보면 증인 서겠다고 선서를 하고나서 실제로 자기가 본 것이나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 해서 억울하게 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았으면 증언하지 않은 사람에게 허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악하다 보십니다. 이런 일들을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값없이 얻는 구원의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아서 그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그냥 세상을 떠났다면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죄라고 분류하지 않고 허물이라고 분류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부정한 짐승이나 죽은 시체를 만졌을 때, 그것을 죄라 하지 않고 허물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맹세를 한 것을 나중에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성물에 범죄 했을때, 남의 것을 속여서 강탈하거나, 길에서 주은 물건인데도 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것들도 허물에 속합니다. 이런 일들은 죄(sin, iniquities)로 분류하기 보다는 허물(transgressions)로 분류를 합니다. 우리가 허물을 잘 들여다보면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일들 중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죄라고 보는 것이 무수하게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죄(iniquities)란 하나님의 거룩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말합니다. 율법으로 죄의 종류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죄의 목록을 주시면서 범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룩에서 벗어난 범위는 율법에서 말하는 죄 보다 넓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죄를 포함해서 모든 부정(不淨)한 것, 악독한 것, 사악한 것들 모두 죄라고 합니다.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 악독함이나 사악함이 구체적으로 겉으로 드러났을 때 그것을 죄들(sin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우리로 하여금 욕심스럽게 하고, 악독하게 하고, 사악하게 하는 그 근원인 육신을 죄(sin)이라고 합니다. 죄(sin)에서 죄들(sins-범죄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죄(in)는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고 죄들(sins)은 구체적으로 범죄(犯罪) 해서 겉으로 드러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죄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범죄한 어떤 어떤 사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범위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7)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었으면 아직 그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미 죄입니다. 물건을 보고 탐심을 품었으면 아직 그 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이미 죄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습니다. 욕심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것은 죄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도적질로 이끌고, 미움은 살인으로 이끌며, 음욕은 간음으로, 욕심은 남을 속이거나 사기를 치는 죄들, 시기는 모함이라는 죄를 낳습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마23:23)


그뿐 아닙니다. 사람들이 음식에 들어가는 향신료에 대한 것도 십일조를 한다고 하나님께 드리면서 율법에 더 중요한 의(의로움)와 인(사람을 사랑함, 긍휼과 자비)과 신(신의, 신실함, 충성됨)을 버린 것도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에 적힌 것만을 죄로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겉의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겉의 것의 실제 주인인 마음의 죄가 진정한 죄의 시작인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고 있는 것을 스스로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죄를 물으실 때는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평화(peace)가 깨진 곳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입니다. 먼저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거룩과 부정(不淨)은 같이 있는 성질(性質)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자연스럽게 분리되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서로 같은 극을 밀어내는 자석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를 범한 부정한 인간과는 같이 있을 수 없는 성질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끊어진 관계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받아야 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기쁨, 자비, 온유와 같은 모든 아름다운 성품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악한 성품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이 성품으로 살게 됨으로 인해 모든 인간관계가 깨어지지 시작했습니다. 평화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세상은 작은 싸움에서 큰 싸움으로, 적은 욕심에서 커다란 욕심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허물과 죄, 그리고 깨어진 평화의 화목제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레위기 3장은 화목제물(Peace offering)을 드립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Peace)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sin offering)으로 그리고 속건제물(Trespass offering)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제물이 되어 주셨고, 우리의 허물을 위해 제물이 되어 주셨으며, 우리의 죄를 위한 제물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상처입니다.

상처(wounds)에는 육체적인 상처와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는 눈에 보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두 실제적인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는 자신의 실수나 남에게 해를 받아서 상처 난 것도 있지만 주로 각종 질병으로 인해 생깁니다. 질병으로 인해서 육신이 썩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의 육신은 썩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흙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셨고(창3:19), 홍수 이후에는 인간의 수명이 120년으로 제한되었습니다(창6:3). 그러므로 자연적인 썩음이 생겼고, 또 여러 가지 질병으로 인해서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땅의 여러 가지 알 수 없는 질병들, 전염병들로 인해 그 썩어 들어감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게 되었습니다. 의술이 점점 발달되어 많은 종류의 질병들을 많이 막을 수 있지만 그래서 인간이 썩어지는 것, 죽음에 이르는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병, 상처 뿐 아닙니다. 마음의 상처는 더욱 심각합니다. 평화가 깨져버린 인간관계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의 허물로 인해 생긴 상처도 있지만 고의적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사건과 사건, 물질적 육체적인 피해들은 마음의 상처들을 같이 남겨줍니다. 말로 인해 생기는 상처들 역시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남에게서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일들로 인해서 역시 내 마음에 수 없이 많은 상처들을 남기게 됩니다. 마음의 상처들은 계속해서 인간을 아프게 하고 그 아픔을 최소화 해보고자 자기 방어기재(self-defence mechanism)가 내면에 자동으로 생겨 자동으로 그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부터 인간 안에 없었던 상처들이 생겼습니다. 죄로 인한 죄의식이 마음에 상처를 내고, 인간끼리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파괴된 관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남으로 버림 받은 마음이 상처가 되었으며, 에덴에서 먹었어야 하는 생명나무를 먹지 못함으로 인해 생긴 굶주린 마음이 생겼습니다. 제사를 거절당하며 외면당한 마음이 생겼고, 영적 능력의 상실로 인해 열등감이 생겼습니다. 죄를 지은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과 이제 죽음을 앞에 두고 생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모든 마음이 인간의 마음속에 상처로 자리 잡히며 인간을 아프게 합니다. 이것만 있어도 아픈데, 이제 삶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가 스스로 낸 상처와 남으로 받은 상처로 인해서 온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우리에게 아주 복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연약함과 병을 다 고쳐주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 병을 짊어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시는 것은 능력으로 고쳐주신다는 그 이전에 그 병이 결국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들을 짊어지시는 것입니다.

마치 죄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가 어떻게 없어졌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지신 것으로 인해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할 근거가 예수님으로 인해 생겼기 때문에 용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병 역시 예수님께서 가져가신 것을 근거로 우리는 병을 주님께 드리게 됩니다. 마치 죄를 주님께 드리고 용서함을 받은 것과 똑 같은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병들을 역시 동일하게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입니다. 저의 큰 아이(딸)가 4학년, 둘째(아들)가 3학년 때입니다. 성탄절 즈음하여 온 가족이 TV에서 나오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인이 된 예수님이 처음 화면에 등장합니다. 예수님 역할을 하는 배우가 예수님 역할에 맞지 않게 좀 못 생겼습니다. 딸인 큰 아이가 그 배우를 보면서 ‘이~유~’라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인데, 좀 잘생긴 사람으로 배역을 정하면 좋았을 걸’ 하는 마음이리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둘째 녀석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어서 그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딸과 아들로서 의견을 나눌 때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둘째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째 녀석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 뜻을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사야서 53장 2절 부터의 말씀을 보면 압니다.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도 잘 생겼을 것으로만 생각하던 기본 개념이 깨져 버렸습니다. 그 분은 연한 순 같다고 합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시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흠모(欽慕)할 많나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예수님에 대한 시적 표현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육신적인 모습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품이 없게 오신 이유가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악함과 추함을 모두 지고 가시는 분으로서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취급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야 하시는 분으로 오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 파괴된 관계들과 상처들을 받기 위해서 육체마저도 그렇게 볼 품 없이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외면적인 열등감까지도 가져가신 주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셨다고 하십니다. 성화나 영화에서는 예수님이 멋있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으십니다. 왜 그렇게 오셨는가를 생각하면 커다란 은혜가 됩니다. 만일 우리 스스로를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모습 예수님께 드리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모습도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고(疾苦)를 아시는 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당할 멸시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7-8) 자의로 이 일을 받으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사53:7-8)


예수님은 남의 죄와 허물, 그리고 남의 저주와 상처를 대신 지고 가시면서 한 마디의 자기 변명도 하지 않으셨습니다(7절).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 스스로 지은 죄가 많아서 할 말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그 어떤 사람들도 예수님이 사람들의 허물과 죄로 인해서 그렇게 죽어가야 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누가 커다란 힘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그 죽음에 넘겨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그렇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10:1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그 누가 예수님을 끌고가 모욕을 주고 채찍으로 때리며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10)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신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11)예수님께서도 이일을 이루시고 만족해 하실 것이라고 예언 되어 있습니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사53:1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오랜 기간동안 예언된 것이 드디어 성취되었는데 예수님은 그것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채 알지도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이런 일을 이뤄 놓으셨습니다. 날 먼저 사랑하신 것입니다.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재무장관)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고 돌아가면서 바로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을 내시가 돌아가는 길목에 보내셔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내시가 타고 가는 병거에 가까이 가라 하셔서 가까이 갔더니 내시가 이사야서의 글을 읽고 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지금 읽은 것을 이해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내시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빌립은 내시에게 그 말씀에 나오는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과 그 분을 통해 구원 받는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했습니다. 내시는 그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이 글은 읽은 모든 분들이 동일하게 복음에 대해 소개를 받았을지라도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히브리서에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히4: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특권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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