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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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3) 아벨의 제사

아벨의 제사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4:3-6)


아벨의 제사는 정성의 제사라고 말하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성의 없이 드리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정성, 최선의 희생을 다해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는 의견입니다. 그 해석이 우리의 주일 예배에도 연결이 되어서,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릴 때에 가인의 제사와 같은 성의 없는 제사를 드리지 말고 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의 제사와 같이 정성을 다해 제사하는 예배가 되자고 말합니다. 갖가지 모범적인 예배 규범이 제시되기도 하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순서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인류의 제사 역사상 가장 처음이었고, 하나님이 받으심과 안 받으심이 분명하였던 제사였으며, 그 제사로 인해서 인류 최초의 살인까지 일어난 심각한 사건과 결부되어 있는 제사였습니다. 사건의 중요성을 보아서도 그러하지만 누구나 평생을 제사(예배)드리며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살펴보아야 할 가장 중심에 있는 제사 사건이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이고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제사인지를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통해서 잘 살펴봄으로, 늘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하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분명한 것은 한 제사는 받으시고 한 제사를 안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또 어떤 증거로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기록이 되지는 않았지만 제사가 끝나자마자 가인이 자신의 제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기분이 나빠 안색이 변했다고 한 것을 보면 즉석에서 그 결과를 알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고 안 받는 제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성의’나 ‘정성’에 대한 문제로 인해 받으시고 안 받으심이 좌우 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기준으로 평가 할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은 중심으로 드렸고 한 사람은 건성으로 드렸다고 하는 것이 기준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고 가 문제가 되었겠습니까? 제물을 준비하는 마음이 성의가 있었고 성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기준이 되었겠습니까? 어느 정도가 성의가 있는 것이고, 어느 정도가 중심이며, 어느 정도가 깨끗한 제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가인과 아벨의 평소의 삶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인의 평소의 삶을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삶을 살지 않았고, 아벨은 그와 반대로 삶이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는 외면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기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제사란 인간 쪽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물이란 나를 대신해서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위가 깨끗해서 그 사람 자체를 받으신다면 우리는 제물이란 것이 필요 없게 됩니다. 나 대신에 드려져야 하는 것이기에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신 것은 이 땅에서 행위가 더러워서 꼭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만을 위해서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인류 모두를 위해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 제물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갈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 즉 아벨의 제사의 받아들여짐에 대한 문제는 히브리서 11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서 아벨의 제사와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 일컫듯이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장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제사와 믿음의 관계’를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서 9장과 10장, 그리고 11장 다음인 12장과 13장에서 무엇에 관해 말을 하고 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11장이 왜 필요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장과 절이라는 것은 나중 사람들이 분류해 해 놓은 것입니다. 그 전에는 장과 절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11장은 따로 떨어진 독립된 것이 아니라 앞의 9장과 10장, 그리고 12장과 13장의 연결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서의 전체 주제는 ‘참된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먼저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십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서 오히려 말하느니라”(히11:4)


여기에서 설명하고 있는 몇 가지 단어들을 살펴보면 아벨의 제사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그리고 「더 나은 제사」, 그리고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 그리고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는 네 구절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전체를 통해서 제사장, 성막, 제물들에 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특히 9장과 10장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영원한 제물 되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죄가 속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지 않고는 우리 죄가 속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구약의 성막에서는 염소나 송아지나 양을 제물로 드렸지만 이제는 예수님 당신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셨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게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냐”(히9:12-14)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9:23-26)


우리에게 제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약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동물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은 나의 죄를 위하여 반드시 피를 흘려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에서는 살아 있는 동물을 제사로 사용하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사용합니다. 살아 있는 짐승을 죽이는 것을 대신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살아 있는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셔야 하는 것을 그림자로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의 짐승은 눈에 보였고 이 천 년 전에는 이 땅에 계신 예수님 역시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을 어떻게 제물로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장은 단순히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들고 나가자는 말을 위해서 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9장에서부터 시작해서 13장까지를 연결하며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강조하며 우리를 밀어 붙이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이 만남은 시공을 초월한 만남입니다. 이 시공을 초월하는 만남을 위해서 꼭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필요한 것이고, 이 만남을 위해서 믿음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9장부터 몇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를 어디로 밀어붙이시는지를 보십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9:23)


9장에 나오는 위의 말씀은 우리를 하늘의 성소로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 즉 하늘에 있는 성소를 본떠서 만든 지상의 성소는 짐승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이제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짐승보다 더 좋은 제물,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제물이라는 말씀과 함께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하늘에 있는 성소”가 그 초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022)


10장에 나오는 위의 말씀에서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으니 하나님께로 나가자고 우리를 밀어 붙이십니다. 이 성소는 “하늘에 있는 성소”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성소에 들어가려면 양심에서 담력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담력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받았을 때 생기게 됩니다. 원래 “지상에 있는 성소”는 일 년에 한차례 대제사장만 들어갔었습니다. 그때도 반드시 피를 들고 들어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러 지성소에 들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새롭고 산길입니다. 그러니 이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죽은 다음에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으면서, 예배가운데 그 지성소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0장의 말씀을 역시 우리를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밀어 붙이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11장에서 우리를 다시 한 번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함에 대해 격려하며 부추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고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분”(요4:23)이십니다. 이 땅에서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지성소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나아가야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1-2)


12장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소개 받게 됩니다. 그곳으로 또 우리를 밀어 붙이십니다. 12장에서는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 만남을 늘 지속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징계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결국에 이르러야 하는 곳에 대해서 우리에게 18절부터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이른 곳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12:18-24)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리고, 그 피로 죄를 씻어 우리의 양심에 담대함을 얻어서 들어가는 그곳, 하늘에 있는 장막은 땅에 있던 모세의 장막과 다르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임재하신 곳은 시내산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을 맞이하시면서 그곳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때 그 산은 “만질 만한 불붙는 산과 흑운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던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하였습니다. 아주 무서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보이지 아니하는 장막”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가 있는 곳입니다.

바로 그곳,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곳에 우리가 들어가기를 고대하면서 히브리서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13:8)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 되심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효과가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모든 면 역시 어제와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러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는 말을 이때 사용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로서의 기능이 구약의 시대에도 그림자로서 우리에게 있으셨고 오늘까지 동일한 제물의 능력이 되시며, 앞으로도 계속 동일한 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에 대해 마지막으로 13장에 다시 한 번 설명하십니다.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이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0-15)


믿음의 제사


그러므로 아벨의 제사는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제물이 되십니다. 그러나 아벨의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막 시대와 마찬가지로 아벨은 자신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는 제사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피를 흘리는 제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피를 흘리는 ‘속죄제’ 즉 죄를 속하는 제사였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믿음이 필요했을까요? 그 시대에 어떤 믿음이 필요했을까요?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혹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어떤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아벨은 들은 바를 ‘믿고’ 피 흘리는 제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드린 제사에 대해서는 다음 설명들을 통해서 더 분명해 지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제사


아벨의 제사를 설명할 때 나오는 「더 나은 제사」의 의미를 살펴보십시다.

레위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몇 가지 제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헌신과 거룩한 헌신을 위해 부정한 것을 씻는 의미의 ‘번제’,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모든 소산물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납하는 상징인 ‘소제’,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화목제’, 죄를 속죄하는 ‘속죄제’,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속건제’가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제사 중에 피를 흘리지 않는 제사는 오로지 소제 외에는 없습니다. 소제만 곡식을 드립니다. 그리고 나머지 네 가지 제사는 다 피의 제사입니다.


“그러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 성소에서 속하게 한 속죄제 희생의 고기는 먹지 못할지니 불사를지니라”(레6:30)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레4:12)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이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히13:10-12)


속죄제가 아닌 다른 제사에 사용한 고기나 식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는 유일하게 그 고기를 먹지 못하고 불살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기가 부정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정한 이유는 사람의 죄를 그 동물이 죄를 뒤집어썼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해서 부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기는 제사장들이 먹지 못하고 성막 밖에 가지고 나가서 태워버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전체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제사는 여러 가지의 제사들 중에 바로 「속죄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속죄제와 아벨의 제사와 무슨 관련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여러 가지의 제사들이 있는데 가인은 소제를 드렸으나 아벨은 속죄제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제사는 속죄제였어야 되었는가 봅니다. 그래서 틀리고 맞는 제사, 혹은 「더 나은 제사」라는 의미가 이해가 됩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릴 당시의 ‘그때’는 아마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렸어야 하는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그 목적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으나 가인은 그 목적에 맞지 않는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아벨의 제사는 좋은 제사이고 가인의 제사는 나쁜 제사라고 말씀하지 않고 아벨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적과 때에 맞는 올바른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제물로 올라가야 하는 제사입니다. 다른 제물들은 인간 안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속죄제를 위한 제물로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제물이 없습니다. 사람이 만일 자신의 죄를 위해서 헌금을 한다든지, 그 죄를 보상하기 위해서 무엇을 노력한다든지, 봉사를 많이 한다든지, 구제 사업을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죄를 위한 제물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죄를 위해서 우리가 우리 것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에서는 첫 것, 구약의 방법을 폐하시고 새 방법을 마련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동물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구약의 방법을 폐하시고 새 방법,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제사로 드리는 방법을 세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5-10)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죄를 위해 드리는 제사에는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제물로도 대신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예배를 제사라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어떤 제사입니까? 속죄제입니까, 아니면 다른 종류의 제사들입니까? 감사하는 제사인 소제입니까?

만일 지금의 주일 아침 예배가 속죄제가 아니라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주일 아침의 예배가 속죄제를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는 바로 ‘가인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예배와 제대로 된 예배의 개념이 있는 것입니다. 정성이 부족해서 잘못된 예배가 아닙니다. 시간에 늦게 와서 잘못된 예배가 아닙니다. 바칠 것을 덜 바쳐서 잘못된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심직한 제물을 드리지 않고 우리의 것, 소제를 드리려 하기 때문에 잘못된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를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매주 범하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주일 아침마다 당연히 속죄제가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 년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속죄제를 드리지 않았다면, 우리의 죄를 위해 다른 제물만을 바친다면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기 위한 제사


아벨의 제사에 대한 설명 중의 세 번째가 바로 아벨은 「의롭게 되기 위한 제사」 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속죄의 제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속죄제」로만이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제사는 자신의 재산 전체를 드리는 소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전체 드리는 번제로 드림으로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제사가 무엇이겠습니까? 히브리서 전체는 바로 「속죄제」에 대해서만 설명합니다. 이 속죄제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시는 제사가 바로 「속죄제」입니다. 번제로 드리고 소제로 드릴지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속죄제입니다. 우리는 바로 「속죄제」로만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들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한 어떠한 제물도 어떠한 제사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낼 방법은 없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스스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렇게 이미 온전하신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서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되어져야 할 것은 바로 「속죄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매 주일의 예배가 「가인의 예배」인가 아니면 「아벨의 예배」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가인의 예배를 드리면서 가인의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봅니다. 그리고 아벨의 예배의 의미를 설명하기를 바로 소제의 제사로 해석하는 사람들, 즉 우리의 온 몸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우리의 온 재산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제물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돈은 가능한 한 새 돈을 준비하라고 하고, 옷은 가장 깨끗한 옷으로 입으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미리 와서 기도하며 정성스럽게 준비하라고 말하고, 예배를 드릴 때는 다리를 꼬지 말고 정중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일주일은 깨끗하게 살고, 정중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몸가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서 당연히 나오는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배워주지 않아도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당연하게 취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마치 안하면 큰일 날 것 같이 율법적으로 배워주면서 예배를 하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가인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빠진, 자기 정성의 제사가 바로 「가인의 제사」 인데, 「아벨의 제사」를 드리자고 하면서 「가인의 제사」 방법을 권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지성, 감정, 의지를 다 해서 하나님 앞에 나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지 않으면 「가인의 제사」인 것입니다. 힘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드려지지 않으면 「가인의 제사」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진실과 정성으로 해석을 하면 사람들을 「가인의 예배」로 초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영원한 제물이 되기 위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천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서 어떻게 매 예배 때마다 드릴 수 있는가? 예수님이 매번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그 방법이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만일 속죄제를 드리는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제물로 드려진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있다면 그들이 당연히 드려야할 제사는 찬미의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제물로 바쳐지셨습니다. 단 한 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제물이 되어주시도록 땅에 다시 내려오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제물로 드리겠습니까? 믿음으로 드립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을 제물을 올려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모일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것을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떡과 잔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 제물 되심을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기념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제물’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당신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신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제물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다 그런 믿음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부분입니다. 보이는 부분으로 주님 앞에 드려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잔치(celebrate)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주일 아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찬미와 감사와 축복과 그로 인한 기쁨이 충만한 시간이 되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을 제물로 올려 드리고 난 후에 드러나는 ‘찬미의 제사’인 것입니다. 찬미의 주인공이 예수님이고, 찬미의 주제가 예수님이고, 찬미의 내용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입니다. 예전에 제물은 모두 제단에서 태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찬양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런데 아무 찬양이나 향기로운 냄새라고 아니하시고 재물이 타는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십니다. 정성의 찬양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하모니의 찬양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올라간 그 찬양이 향기로운 냄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의 제목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레1:9)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하심


그렇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드린다고 했을 때, 제대로 드렸는지 제대로 드리지 않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아벨의 제사에 대한 히브리서의 네 번째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하셨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리고 받으셨는지 안 받으셨는지 그 결과를 어떻게 바로 알았겠습니까? 미루어 추측하기를 그 제물에 불이 내려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더니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태웠습니다. 하나님의 응답하심입니다. 동일하게 아벨의 제사 역시 하나님께서 불로 태우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쪽은 우리 쪽의 행위라면 제물을 받으심에 대한 응답은 하나님 쪽의 구체적인 행동이십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장막을 위해 보이지 않는 제물을 보이지 않게 믿음으로 드립니다. 그렇다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고, 아브라함의 제물은 불로 태워서 받으셨지만 우리의 제물이 받아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사 드리는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제사를 받으신 것이 분명할 때 우리 안에 증거가 생깁니다. 그 증거들은 이런 것들입니다.



죄가 있던 사람들의 죄가 실제로 없어집니다. 양심의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죄의 세력으로부터 분명하게 해방됩니다.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근거로 죄를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와 죄의식이 없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믿음이 화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이 아직 없으신 것입니다.

죄의 문제뿐 아닙니다. 우리의 상한 심령이 어떻게 치료가 되겠습니까? 우리의 육체의 질병이 어떻게 치료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임한 갖가지 저주들에서 어떻게 해방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응답하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제물은 우리가 드리고 응답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서 증거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람들 가운데 보여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나타나ㄴ는 예배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증거 중에 가장 큰 증거는 하나님과의 교통함입니다.

양심의 담대함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케 만듭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신령(영)과 진정(진리)으로 예배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과 교통함이 생깁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됩니다. 휘장을 지나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지성소는 고요하고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그 안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만나가 있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진 석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밖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성소에서 말씀하십니다. 지성소에는 죽었던 모든 것이 소생하는 곳입니다. 지성소에서 우리는 공급하시는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매일 매일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이것을 ‘극락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제물이 준비가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응답하심, 즉 불이 붙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불은 성령이고 이 불은 믿음으로만 반응됩니다. 그러므로 제물이 아무리 훌륭하게 준비되었더라도 믿음이 없이는 불이 없습니다. 불이 없으면 타는 것도 없으며, 타는 것이 없으면 향기도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소리 높여 찬양하더라도, 또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찬양만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아벨의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태우시는 불이십니다.


모든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주일 아침마다 ‘속죄제’를 드리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바쳐지는 시간이 되어지면 좋겠습니다. 주일 아침 예배는 당연히 우리의 죄를 위해서, 우리의 상처를 위해, 우리의 저주를 위해서, 우리의 병을 위해서, 우리의 열등감을 위해서, 우리의 수치를 위해서, 우리의 유전된 망령됨을 위해서, 우리의 악함을 위해서, 우리의 욕심을 위해서, 깨어진 관계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로 바쳐지는 시간이 되어져야 합니다. 삶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난 죄들,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저주들, 사단의 공격들, 여러 가지 아픔의 순간들, 여러 가지 추악한 모습들, 연약한 모습들을 위해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의 제물이 되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믿음으로만 드릴 수 있습니다.


만일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개 교회 혹은 어떠한 모임에서든지 모여지는 시간들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개인으로라도 이런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저주에 대해서 해방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 자들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우리가 모이는 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 예배가 되어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드리는 제사가 「아벨의 제사」가 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아벨의 제사」와 다른 「우리의 제사」의 차이를 보겠습니다.

아벨에게는 한 가지 믿음만 필요했습니다. 믿음과 짐승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아벨의 믿음과 같은 믿음으로 피가 죄를 속한다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제물과 보이지 않는 성소에서 보이지 않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 믿음이다. 이것이야말로 믿음이 없이는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만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사람의 어떠함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기보다는 방법에 대한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아무리 속이 썩어 있는 사람일지라도 양을 가지고 성막으로 가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다릅니다.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곳, 즉 우리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떠한 예배 순서, 어떠한 예배시간, 혹은 어떠한 찬양을 부르면 분명하게 제사가 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속은 어떻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제사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가장 좋은 순서들을 마련해서 그것만 잘 치러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한 찬양을 많이 하고 보혈에 대한 찬양을 많이 한다고 해서 아벨의 예배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적으로 발생한 것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세계 속에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가지고 나가며, 믿음으로 내 죄와 허물과 상처와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께 이전시켜서 하나님 앞에 올려놓으며,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이 지금의 예배입니다. 복잡합니까? 믿지 않는 사람이 보이기에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만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믿음의 세계 속에서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11:1)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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