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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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5)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

언약을 기억하시는 분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창9:13-16)


하나님이 무지개를 ‘내 무지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셨습니다. 그 무지개를 친히 구름 속에 두신 이유는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십니다.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노아의 가족으로 새롭게 인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을 심판하시고 싶으실 일이 생겨서 물로 심판하시려 구름을 모으시고 구름으로 땅을 덮으실 때 구름 속에서 무지개가 나타나면 그 무지개를 보시고는 물로 세상을 멸망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 스스로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지개를 달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제발 이런 식으로 심판하지 마십시오라고 인간 쪽에서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심판 받을 정도로 악하게 살지 않을 테니 우리에게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표를 주십시오’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스스로 무지개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을 합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심판의 도구 속에 사랑을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심판하려 할 때에 그 심판의 도구 속에서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시기 위해서 스스로의 표징을 넣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3:2)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진노 중에 긍휼을 잊지 않으시기 위해서는 긍휼함을 발동시킬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이 가장 커다란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언약(言約)은 절대 스스로 어기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기억하시기 위해서 무지개를 두셨습니다. 물로 심판을 하려 물을 모으실 때 구름 속에서 무지개가 비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넣으신 구름 속의 무지개를 보시면서 스스로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도구 속에 사랑의 언약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언약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2-13)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아만 구출하셨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애굽 땅만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건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내시기 위해서 애굽을 치면서 내리셨던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재앙은 하나님이 죽음의 사자를 애굽 땅에 보내시는 것인데, 죽음의 사자가 이 땅에 내려와서 이 땅에 있는 사람과 짐승은 상관없이 처음 난 것들을 다 죽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과의 사이에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그들이 살고 있는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제 내려와 장자들을 죽이고 다닐 때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피를 보면 그 집은 넘어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창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문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문에 피를 바르면 그 피를 보고 넘어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실제로 죽음의 사자가 와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고 다닐 때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집마다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습니다. 피를 바른 집에는 심판이 임하지 않았습니다. 이 피를 바르는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심판을 피하게 되는 신약의 사람들에 대한 그림자였습니다.


이 언약 역시 하나님 쪽에서 하셨습니다. 사람 쪽에서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먼저 방법을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 쪽에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아닙니다. 사람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정에 의해서 피를 바르라 하셨고, 사람쪽에서는 단지 그 피를 바르는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이 악한 사람이건 선한 사람이건 상관이 없었습니다. 죽음과 삶의 차이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발랐느냐 안 발랐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집안에 있는 사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에 피를 바르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세우셨습니다. 마치 노아 때에 온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구름 속에 무지개를 두시고 심판할 마음이 있으셔서 구름을 모을 때에 그 무지개를 보고 언약을 기억하고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심 같이, 애굽 땅에 진노의 심판을 하실 때에 이스라엘 집의 문에 있는 그 피를 보면 그 집은 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노아 때의 심판과 애굽의 심판이 다른 것이 있다면, 노아 때의 약속은 인간 쪽에서 알던 모르던 하나님 스스로 그 약속을 보시고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애굽의 심판은 우리의 믿음의 근거로 그 피를 발랐느냐 안 발랐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집들마다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고 안 바르는 것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피를 바르는 일을 하셨을까요? 왜 수 많은 방법 중에 피를 바르는 방법을 언약으로 세우셨을까요? 이것은 바로 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방법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해서 그들을 구속하셔야 합니다. 그 구속은 단지 애굽에서 건져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구속(救贖)이라는 단어의 의미대로 값을 지불하고 사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종으로 잡고 있는 애굽의 세력을 부수는 것과 함께 그들의 죄 값을 지불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구속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정사와 권세의 모든 세력으로 승리하셨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을 정결케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구약의 있었던 사건과 신약의 사건이 그림이 똑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잡고 있던 애굽의 세력이 사단의 세력으로, 그리고 피를 문설주에 바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3-15)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이 땅의 사람들을 잡고 있는 사단의 세력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사단이 사람들을 종으로 삼고 있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죄 때문입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요8:34)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지은 죄를 근거로 우리를 종으로 삼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의 노예가 된 것처럼 사단의 노예로 살게 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애굽에 내리신 재앙으로 애굽의 세력을 멸망시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셨듯이 죄로 인해 종살이하는 사람들의 위해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려 오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


예수님의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 뿐 아니라 죄를 지어 마귀에게 종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덮으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할 죄악 된 인간 사이에서 심판하지 않으실 언약이 되어주셨습니다. 마치 무지개와 같이 마치 문설주에 바른 언약의 피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언약이 되어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그런 인간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심판 사이의 긍휼과 자비의 언약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면 마땅히 심판 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막아서신 은혜의 언약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으로 심판 받아야 마땅한 이 땅의 사람들과 당신의 진노 사이의 언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죽음의 사자가 보고 넘어갔던 그 어린양의 피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옛날 노아 시대에 ‘내가 내 무지개를’ 두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언약의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 쪽의 요구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구원의 길을 마련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을 보고 결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대가를 요구하며 세우신 언약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7)


이렇게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당신의 피로 우리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8)


그러므로 언약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백사람이 있더라도 그 백사람이 나름대로 구원 받는 방법에 대해 믿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죽이시기야 하겠는가?’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최선을 다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에 철저히 나오고 교회에 충성하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언약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이 언약 속에 있는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 믿음이 언약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주의 떡과 잔을 기념할 때...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11:23-26)


예수님께서 이 땅의 교회에 유일하게 주신 예식이 있는데 그것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같이 떡과 잔을 나누시며 언약을 하신 것입니다. 교회에게 대대로 이를 행하여 언약을 기념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식을 행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 번째는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집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행함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거한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심판을 받으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행위에 근거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의식을 행할 때마다 우리는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께서 죽으신 죽음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행위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의 행한 바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세우신 언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두 번째로 이 의식은 하나님으로 기억나시게 하는 의식이다.

‘구름 속에 두신 무지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예식은 우리에게 어떠한 저주가 있던지 어떠한 불신앙이 있던지, 어떠한 범죄가 있던지, 어떠한 삶을 살았던지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 쪽에서 보시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마치 우리를 심판하려고 구름을 모으시다가 그 구름 속에서 무지개를 발견하시고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여러 가지 범죄로 인해, 여러 가지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려다가, 저주를 대신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우리를 보시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시면서 우리에게 마땅히 임해야 할 저주와 징계들을 임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저주와 징계가 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믿음을 잊어버릴 때에 우리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사단에게 노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방패가 필요하고, 의의 흉배가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무장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의로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선줄로 생각한 사람일지라도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떡과 잔을 기념할 때에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노아 때의 무지개는 지금도 하나님 쪽에서만 보시고 하나님 쪽에서 심판을 하지 않으시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알던 모르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언약을 철저히 지켜 나가고 계십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육체가 되고 범죄 가운데 있더라도 스스로 세우신 무지개를 보시면서 스스로 세우신 언약을 지키시는 것입니다. 노아 때보다 땅이 더욱 범죄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이 언약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죄를 지을때 마다 벼락을 맞지 않는 이유입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질 때 그 망대에 치어 죽은 사람들이 죄 있는 사람만 죽은 것이 아닌 이유입니다. 모든 심판은 마지막 날로 미루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님께서 세우신 언약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고 신실함이 있습니다. 사람 중에는 신실함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민23:19)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생은 식언(헛된 약속,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한번 결정한 언약에 후회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사람이라면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일도 시간이 지나면 후회합니다. 그러나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는 앞뒤를 벌써 다 보시고 후회가 없으신 약속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감정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 쪽의 문제이지만 하나님 쪽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감정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과 언약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언약은 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수많은 약속들을 하셨습니다. 그 모든 약속을 자기 것을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거듭남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리고 그 거듭남은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죄 사함과 영생을 위한 언약의 말씀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보이는 사건들을 통해서 신약의 보이지 않는 사건들을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감정(육정)에 구원의 근거를 둘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사람의 뜻)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기독교 가정에 태어난 것(혈통)으로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거듭남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 속에 사랑을 넣으셨습니다. 인간들을 다시 심판하시려고 물을 모으실 때 하나님께서 넣으신 무지개를 보시면서 심판을 하지 않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우리의 심판 앞에 막아설 분이 계신데 그 분은 우리를 위해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이 언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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