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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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6)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無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자식을 줄텐데 그 자식을 통해서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능히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주겠다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는 그 ‘믿음’을 ‘의(義)’라고 칭하셨습니다.


이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義)는 행동에 의거한 것을 말합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대로 행했을 때 의인이라고 칭하고 율법대로 행하지 않았을 때 죄인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하셨고 그 하신 말씀을 믿었더니 의인이라고 칭해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행동이나 상태를 보고 의인이라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니 그것을 의(義)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 안에서는 율법이나 윤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을 의인(義人)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의(義)’라는 개념이 나타났습니다. 이 새로운 개념의 의(義)를 ‘하나님의 의’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서 의인과 죄인으로 나누는 기준이 율법을 주신 것은 B. C 1446년입니다. 그런데 그 보다 오백 년 전에 이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그 동안 아브라함이 행실이 곧았기 때문도 아니고 선행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우상의 도시에서 우상 장사를 하는 아버지 밑에서 생활했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가뭄에 남방으로 내려갔다가 그곳의 왕이 어여쁜 자기 아내를 빼앗고자 자기를 죽일까봐 누이라고 속이기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칭한 것은 아브라함 쪽의 어떠한 것을 보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에 의로 여기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는 설명을 하면서 아브라함이 얻었던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3:20-27)


사도 바울은 먼저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의(義)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그러면서 이 의(義)는 율법을 지켰을 때 칭함을 받게 되는 의인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의라는 것을 설명합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義)”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율법을 통해서 이 땅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기능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를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서 다 죄인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인이 되는 방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하나님의 의(義)”를 준비하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믿는 사람만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믿음으로만 소유하게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그 동안의 행실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죽음으로 마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오직 믿음의 법칙 안에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경건한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의롭다 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이런 방법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를 획득한 사람은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어떠한 죄를 지었더라도 그 죄를 인정치 않으시는 특별한 의입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롬4:1-9)


아브라함에게 조상(祖上)이라는 호칭을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현재 이 땅의 인구 중에 약 35억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육신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을 통해서 낳은 육신적인 자녀들이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모든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스마엘의 자손들입니다. 또한 가톨릭, 기독교, 모슬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전 세계 인구의 반이 넘는 사람의 조상이 되었으니 세상적으로도 유명하고 또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브라함이 그렇게 유명해진 단 하나의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은혜’를 믿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믿는 믿음에 대한 중요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는다고 했을 때 바로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를 믿는 믿음과 동일한 종류의 믿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약속을 하실 때부터 그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 같이 많게 하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처음부터 믿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은 것은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백세가 되어 자기에게 생식능력이 없어지고 사라에게 경수가 끊어져 태가 죽은 것 같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 져서 약속을 의심치 않고 능히 이루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 이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의(義)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동일하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의인이 되는 법칙 역시 믿음으로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 때문에 죽음에 내어주고, 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죄 있는 사람들, 의로워 질 수 없는 사람들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의롭게 되는 방법이므로 은혜이고, 은혜는 믿음으로만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4:17-5:1)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와 "하나님의 의(義)"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하나님의 의(義)"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의(義)는 성경에서 율법에 의한 의라고 말합니다.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흠이 없게 사는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말을 할 때 사용하는 의(義)입니다. 이 의(義)는 사람의 말과 행동의 결과에 의해서 얻어지는 의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을 바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속에서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우리 속에 있는 생각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하나님의 의(義)"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고, 우리의 행했던 어떤 죄도 묻지 않으시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하시니 너무 허황된 것 같은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너무도 쉬운길, 믿기만 하면 되는 길을 마련하시기 위해 커다란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값을 대신 치르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義)"를 얻는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 몇 군데를 더 살펴보십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9)




우리나라와 같이 권선징악(勸善懲惡)과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개념과 같은 유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義)"를 갖게 되는 것은 온전히 은혜라는 의미가 잘 깨달아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죄를 지었으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는 인과응보의 개념에서 값없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중에서도 율법을 지키는 일에만 힘쓴 사람들 역시 은혜가 무엇이라는 것, "하나님의 의(義)"가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깨닫기가 참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은혜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았고, 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 사도들을 다 죽여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은혜의 복음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교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힘써 하나님 앞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 중에도 상당수가 이 은혜, ‘"하나님의 의(義)"’의 개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교의 배경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로서는 이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신관(神觀)을 가지고 교회에 들어와서 자신이 이해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성경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길을 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는데 그 엄청난 일을 이루신 일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면할 뿐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 의로, 깨끗하게 살아보려는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고 있으니 하나님은 더욱 안타까우신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께 열심히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이 지식을 좇은 것인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義)"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義)"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마르틴 루터가 깨달은 “하나님의 의(義)”

루터의 고민은 "하나님의 의(義)"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의(義)"에서 끝납니다.

고민의 시작은 "하나님의 의(義)"를 율법의 의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義)"라는 단어만 나오면 하나님께 화를 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義)"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심판하시는데 사용하는 기준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의에 의거하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2년도 채 되지 않아서 신부 서품을 받을 정도로 엄격한 수도원의 모든 규정을 다 만족시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금욕을 위해 먹는 것 마시는 것을 절제하며, 수면을 절제하며, 추위에 옷을 정상적으로 입지 않고, 몸을 채찍으로 때리며 수행하는 그 모든 과정의 훈련을 마쳤던 것입니다. 루터는 과정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하였습니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AD 313년 이후로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개념이 기독교 안에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루터시절 당시에 기독교 안에 “"하나님의 의(義)"”를 통해서가 아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몇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선행을 통해서, 그리고 성자들이 쌓아 놓은 공로를 받음으로, 그리고 신비한 경험을 통해 신과 합일을 이루는 것, 그리고 쉴 새 없이 고해 성사를 함으로 자신 안에 모든 죄를 다 고백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시대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루터는 이 네 가지 중에 다른 세 가지는 자신이 너무 더러워(인간 모두가 그렇다고 생각함)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고해 성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는 쉴 새 없이 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고해 성사를 했습니다. 어느 날은 6시간 연속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고해 성사를 마치고 걸어 나가다가 죄가 생각나면 다시 돌아왔습니다.

루터가 자신의 죄를 점검하는 기준은 십계명과 일곱 가지 커다란 죄(Seven deadly Sins - 색욕, 식탐, 시기, 탐욕, 나태, 교만, 분노) 이었습니다. 십계명과 일곱 가지 죄악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루터로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루터의 절망스러워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수도원장 요하네스 폰 슈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 는 성경을 직접 읽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은 아무나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렇게나 해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로만 되어있었습니다.

루터는 29세에 신학 박사가 되어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를 강의했습니다. 그가 로마서를 읽을 때 한 가지 빛을 보았는데 그것은 로마서 1장 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실제로 로마서 연구를 많이 하고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이 말씀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제대로 알아나가기 시작은 했지만 자기가 이해하는 것이 정말 맞는지에 대한 의심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해하기 시작한 로마서는 당시 기독교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의 앞뒤, 그리고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통해 그 말씀에 대한 진의를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친히 빌라도의 심판석까지 밟고 올라가셨다고 알려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속죄 기도문을 외기 시작했습니다. 그 계단은 어떤 순례자들이라도 속죄 기도문을 외우면서 그 계단을 오르면 9년간의 죄를 면죄 받을 수 있다는 교황의 선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계단을 오르는 중, 로마서 말씀의 "하나님의 의(義)"에 대한 진리의 말씀이 그의 내면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리고는 독일로 돌아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몇 번이고 묵상을 했습니다.


말씀은 분명했고, 루터는 분명한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임을 확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거듭났다는 것, 구원 받았다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義)”는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이루려고 “하나님의 의(義)”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이 더 옳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식을 쫓아야 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義)”를 획득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커다란 구원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의(義)”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히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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