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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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7)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이삭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을 쫓겨 날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단의 머리를 짓밟아 버릴 것이라고 예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고얀 것은 그 뱀이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창3:15). 기록된 성경을 가진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 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단의 일을 멸하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3:8)고 기록된 대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단도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저항을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공격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 공격으로 인해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당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으로 받는 그 죽음 역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속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미리 아시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으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제 땅으로 내려 보내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독생자에게 고난과 수치를 당케 하셔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과 침 뱉음과 조롱과 채찍질을 당해야 합니다. 동산 높은 곳에서 벌겨 벗겨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모든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져야 합니다. 제단위에서 죽임을 당하는 제물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미리 보십니다. 마음이 안타까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당신이 하시려는 계획을 아브라함을 통해 이 땅에 보여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모습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셔야만 하는 하나님의 이땅을 위한 구속의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이 땅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명하십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1-18)


아브라함 쪽에서는 하나님의 곤란한 주문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을 아주 난감케 하는 주문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아들 이삭이 누구입니까? 자식이 없는 집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입니다. 그것도 아브라함 나이 백세가 되어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것도 자기에게 생산 능력이 떨어졌고 아내 사라가 경수가 끊어져 생산 할 수 없었던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이 아이를 통해서 만국이 복을 받게 하겠다 하시던 바로 그 아들입니다. 그런데 제물로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쉽지 않은 시험(test)을 앞에 두고 있게 되었습니다.


시험(test)라고 하는 것은 배운 것을 잘 배웠는지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도 이 일을 시험 받을 만큼의 믿음의 수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꼭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방법에 대한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을 제대로 좇는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과의 동행을 제대로 했는지에 대한 것을 알고자 하시는 시험(test)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정말 얼마큼 사랑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십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은 시험(test)이 아니라 유혹(temptation)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동안 어떤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일까요? 이런 일에 대해 어떻게 배운 하나님을 적용하게 될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배웠기에 이런 시험을 받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면서 지냈을까요?


대부분 어려운 시험(test)을 당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조금밖에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하나님의 어려운 시험(test)을 당하는 사람이 믿음에 실패한 것 같고, 벌을 받는 것 같아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배우며 시험받는 일에 대해서 이해도 못할뿐더러 그 사람으로서는 절대 통과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사랑하자 하십니다. 그래서 주위의 모든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가 많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시험(test)로 많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지냈던 모두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모든 것보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지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사건으로 물으십니다. 시험(test)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사건에 대해 행동으로 답해야 합니다. 시험지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답을 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해야 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에 있는 산으로 향하듯이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사건의 마지막에 아브라함은 이삭 잡으려고 칼을 내리쳤습니다. 아브라함의 마음 안에서는 이미 결정이 난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막으시겠지라고 생각했다면 칼을 정말로 내리 칠 수 없었습니다. 시험에 통과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을 받아서 백세에 아들을 낳았고 지금 이삭의 나이도 있고 하니, 계산해보면 지금까지 약 40년 이상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의 신앙은 어디에까지 간 것일까요? 40년이면 제법 오랜 시간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7-19)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믿음으로 드렸다고 말을 합니다. 무엇을 믿는 믿음이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압니다. 이삭을 통해서 낳은 자식 이삭을 통해서 자손을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가지고 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아들 이삭을 죽이라고 할 때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믿음이 아닙니까? 그 동안, 아브라함 전에 이 땅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다시 살리신 적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역사 속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얼마나 크게 보고 있는 것이냐 하면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나는 죽은 자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말씀하셔도 믿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죽음은 한 인생의 모든 것을 끝나게 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죽음보다도 크신 하나님이신 것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쪽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그만큼 크게 생각하고, 그만큼 믿고 있고 그만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절대적인 신뢰와 존경, 그리고 그 위대함의 크기를 가장 넓혀서 믿고 있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으니 이론적으로만 믿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시험(test)앞에서 번번이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확장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 같은 자기 몸을 통해, 죽은 것 같은 사라의 몸을 통해 생명이 생기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주 적은 기적을 통해서 더욱 커다란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보았고 경험한 것만 믿는 믿음이 아니라 보고 경험한 것을 통해서 아직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일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모든 것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아브라함)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4:17)


아브라함이 칼을 내리 치려 했을 때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미 이삭은 죽었습니다. 아직 죽지 않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마음의 명령을 듣습니다. 마음에서 결정되면 육체가 움직입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이삭의 죽음이 결정이 되었으니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기까지 보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이삭이 죽었더라도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이땅을 위한 제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제 앞으로 2000년 후에 있어질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사건 속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너무나 그 정황이 같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과 예수님의 출생부터 동질성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기능과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다음, 즉 인간적인 생식 능력이 완전히 없어진 수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물론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남녀 관계가 없이 이삭을 주시지는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표현대로 죽은 몸과 같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해서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 탄생이 이렇듯 신비합니다. 온전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탄생이 그러합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온 인류를 위한 예수님을 주실 때 그렇게 주셨습니다.


이삭과 예수님의 삶이 비슷합니다.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순종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생각할 때 아브라함을 그리고 육신적인 모습을 처리해야 할 때는 야곱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이삭의 아들 야곱은 약은 꾀, 즉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지 않은 태도인 인간적인 모습을 죽여 나가랴 할 때는 야곱을 생각합니다. 야곱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온유함과 겸손함, 그리고 순종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은혜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삭은 자기 스스로 일구어 낸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유산을 가지고만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듯이 늘 이스마엘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대항하거나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온유함과 겸손함으로만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바보스럽습니다. 그는 어머니 사라와 아주 친밀해서 사라가 죽은 뒤에 그를 위로할 만한 사람이나 일 조차 없었습니다. 아내조차도 아버지가 얻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 엘리에셀을 무려 800Km 떨어진 고향으로 보내 리브가를 얻어왔습니다. 어머니 사라가 죽은 후에 위로를 얻지 못했던 이삭은 리브가가 온 다음에야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이삭은 무엇 하나 창조적으로 산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다못해 실수 까지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했던 실수를 그대로 합니다. 그랄로 내려갔을 때 아내 리브가가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차지 할까봐 누이라고 속인 것 까지 아브라함과 똑 같습니다. 누가 우물물을 빼앗으려 하면 그냥 주고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우물을 다시 팔 때도 아버지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팝니다.

꼭 예수님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고 고백하신 것처럼 이삭의 삶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이삭의 삶은 아무 것도 없을 것만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정으로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주겠다고 하셨고, 이삭은 그 복은 그냥 은혜로 누리며 산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그 복을 누려보려고, 더 많이 가져 보려고 노력했지만 이삭은 그 은혜 안에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은혜로 대하셔서 농사를 지었더니 100배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이삭이 이러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 역시 전적으로 아버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으셨습니다. 자기 의견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자기의 뜻이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자기의 목표가 하나도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의견이 자기 의견이 되었고, 아버지의 뜻이 자기 뜻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목표가 자기의 목표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5:19)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하시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하십니다. 마치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없었다면 이삭의 생애도 없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아버지의 원하시는 것만 행하면서 사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복종하시는데 죽음의 길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온유하심, 그 순종하심으로 인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이름을 받으시게 되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죽음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삶은 마지막 번제단에서 아브라함에게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묶이며 죽음을 받아들인 이삭의 모습속에서 발견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제물이 되는 일에 되해 일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중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어야 하시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일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기에 겟세마네애서 순종의 기도를 하셔야 했지만 이삭은 창졸지간에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저항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이삭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주신 죽음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창세기 22장 2절 말씀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표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표현하실 때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자식 이삭을 정말 사랑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 마음을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2절에서 다시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한 산”에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리아 땅, 하나님께서 지시한 산은 바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산으로 지목되는 산입니다. 브엘세바에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신 골고다는 북동쪽 약 80Km되는 곳으로 걸으면 약 사흘이 걸리는 곳입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죽으신 곳이 두 군데로 알려 졌고, 모리아산도 이곳이다 저곳이다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곳이 모리아산(대하3:1)이고, 예수님은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셔야 함으로 밖의 언덕에 나가서 죽임을 당하셨으니 아브라함에게 지목된 장소가 바로 예수님이 죽으신 곳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이삭의 번제됨의 모든 모습이 똑 같은데 학설로 인해서 장소만 불분명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시느라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에는 장소까지도 분명하게 “그 곳”으로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맞는다면 이삭이 제물로 바쳐진 장소와 예수님이 죽으신 곳은 동일한 곳입니다.


6절에서는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갑니다. 마치 예수님이 자신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8절에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한 속죄 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것입니다.

14절에 아브라함이 그 장소를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는데 사람들은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 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을 우리의 모든 삶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말로만 받지만 실제는 인류를 위해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 산에 준비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그 산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13절에서 우리는 그 그림을 우리는 다시 볼 수 있는데 이삭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바로 그 시간, 그 장소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위하여 양을 한 마리 준비하셨습니다. 모든 그림이 이삭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의 그림이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이삭이 죽을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삭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그림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한 번 계시하십니다. 이삭을 위해 대신 죽을 양을 통해서 예수님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죽었고, 그래서 히브리서 말씀대로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히11:19)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부활하심으로 다시 받으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위한 구체적인 걸음으로 아브라함을 택하셨고 그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제 이루셔야 할 하나님의 짐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 땅에 보여주셨습니다. 그 짐은 아들이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것이고, 그 일을 통해서 사람 아브라함을 시험(test)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건, 즉 제물, 사흘길 되는 모리아 땅, 그 중에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 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양등의 모든 것을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과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시험을 통과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계시하십니다. 16절에서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말씀하셨고, 17절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씨”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씀하신 것 과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대적의 문을 얻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십니다.(계1:18) 음부의 권세들, 사단의 정사와 권세들에 대한 완전한 권세를 쥐신 분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완전한 승리를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14-15)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되어진 일들입니다. 우리가 알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려면 독생자를 보내셔서 죽임을 당하게 하셔야 합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창세기 때부터 하나님의 짐으로서 있으시다가 아브라함 때에 이삭과의 관계를 통해서 그 모습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온전한 은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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