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ce Story
은혜 이야기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07 (목)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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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이야기(9) 벧엘의 하나님

벧엘의 하나님


우산들(아담과 예수 그리스도, 율법과 은혜,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벧엘의 하나님)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아 심판에 이르게 되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롬5:12-21) 우리는 누구의 밑에 있느냐에 따라서 죄인이 되고 의인이 되는지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누구의 우산 밑에 있느냐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이 결정됩니다. 이는 그 우산 밑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동안 악한 행동을 많이 했는지 선한 일을 많이 했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내가 누구의 우산 밑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15:22)


내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느냐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의 우산 밑에 있는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율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오직 하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우산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함을 받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삶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들 역시 은혜로 말미암아 살게 됩니다. 만일 구원만 은혜로 받고 나머지는 다 내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면 이 땅에 제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은혜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은혜로 성령을 부으셔서 그 능력 안에서 살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그 은혜로 살게 하시기 위한 통로이며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한없는 복을 주시며 그 복은 아브라함의 자손 대대로 이어질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삭은 그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하신 복을 야곱에게 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약속하신 그 복을 누리며 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스스로 계약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사건 살펴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은 후에 그리스도 안에 서 어떻게 풍성한 삶을 누리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28:10-22)


야곱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그전에 하나님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중요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만 하고 믿지는 않았다면 그는 구태여 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고, 또 아버지 이삭을 속이는 커다란 위험들을 무릅쓰고 장자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다루시기 시작을 하셨습니다. 고난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도망가게 하시고 벧엘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들고 믿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전까지 하나님을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동안은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것이지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듣던 하나님이 아니라 만난 하나님이 중요합니다. 벧엘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고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면서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을 네게 완전히 이룰 때까지 떠나지 아니하고 함께 하며 다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에게 하신 약속이 아니라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복이 있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 복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때의 야곱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 알기를 자기 같은 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자기 성품이 그랬던 것 같이 하나님도 약삭빠른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하나님 앞에서 조건을 답니다. 하나님과 거래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으로 인한 무조건적인 축복을 약속을 하시지만 야곱은 그것을 받아 누릴 줄을 모릅니다. 약삭빠른 성격이 하나님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조건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또 율법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무조건적인 축복의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이요 아버지 이삭이 만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그 은혜 안에 살았고 이삭도 그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삭이 야곱을 축복할 때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축복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과 거래를 합니다. ‘만약 이렇게 저렇게 하시면 나도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조건을 걸고 하나님과 계약을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우산 밑에서 나와서 계약의 우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 집으로부터 도망 나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면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 없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가장 급한 것이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길에서의 위험에서의 보호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에 돌아가게 하시면”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야곱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다면 이런 조건을 달지 않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누리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직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의미를 모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의 될 것이고, 이곳에 전(殿)을 만들어 드릴 것이며,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한 이 세 가지 약속을 보면 야곱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지식 속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첫째로, 야곱은 만일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면 그 후에야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조건을 겁니다. 만일 안 해주시면 자기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그는 이삭의 축복을 통해 자기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모든 축복이 이미 임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축복을 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곱은 그렇게 축복을 해주시면 여기 계신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지 하나의 거처에 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마치 도봉산에서 만난 신을 만났다고 하며 도봉산에 신이 계시니 그곳에 성전을 지어주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로 자기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신 분이 아닙니다. 또 그 중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야곱은 스스로 하나님을 축소시켜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두려워 떨고 있을때에 안타깝게 보시고 그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복을 주겠다고 한참을 말씀하신 뒤입니다. 야곱에게 하신 축복을 보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축복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스스로 조건부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야곱 스스로의 삶이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성품이 원래 그런 성품입니다. 시기하고, 속이고, 가로채며 살아왔던 야곱은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 성품 그대로 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는 대로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행하십니다.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믿으면 심판 주로, 율법의 하나님으로만 믿으면 율법의 하나님으로 행하십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으로 믿으면 긍휼의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으면 사랑의 하나님으로, 은혜의 하나님으로 믿으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무척 달라집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을 원망하여 ‘이제 광야에서 죽게 되었구나’ 했더니 정말 광야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을 들으셨다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야곱은 이전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벧엘에서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다리가 있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는 ‘여기가 하늘의 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그곳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은 아직 그것을 모릅니다. 말로만 듣던 하나님을 처음 뵐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처음 만나면 그 이전에 들었던 하나님의 의미가 상실이 되고 하나님을 경험한 그때부터 하나님을 진짜 알아나가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경험하였느냐에 따라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알고 섬기느냐가 결정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으로만 축소시키면 문제가 생깁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벧엘의 하나님’으로 불렀던 것이 바로 그런 경우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아닌 벧엘의 하나님으로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난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이고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은 의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자기가 경험한 그 장소, 그 방법, 그 때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참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그 의미는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라면 이런 분일꺼야라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자처하며 자기가 믿는 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동성연애자는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동성연애자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믿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안에 있는 종교심이 교회로 쉽게 가기에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믿을때 자신들 안에 있는 종교심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실제 하나님의 모습과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참 많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많은 세월을 보낸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를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십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체험한 하나님은 사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었건만 야곱 스스로 인식한 것은 ‘벧엘의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셨을 때는 ‘벧엘’을 다시 상기시키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상기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벧엘’에서 야곱이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을 상기시키십니다. 그것은 야곱의 서원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벧엘의 하나님’은 욕심이 많고, 계산적이고,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는 자기의 힘을 더 신뢰하는 야곱이 이해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이때 야곱에게 정말 ‘벧엘의 하나님’처럼 행하셨습니다.


사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피해 도망하는 야곱을 불러서 축복하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복을 말합니다. 이삭이 지칭하는 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삭이 말하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복을 네게 주시되 너와 함께 네 자손에게 주사 너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곧 너의 우거하는 땅을 유업으로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창28:3-4)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이 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 중이셨습니다. 이삭은 이 은혜를 받아 누리고 살았기 때문에 그 복은 다시 그 아들 야곱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복은 아브라함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손 대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대대로 주신다고 하신 그 축복을 그대로 누리며 살듯이 그 아들 야곱도 그 축복의 은혜를 그냥 누리며 살았으면 되었습니다. 이 복은 바로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복이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 복의 줄기, 아브라함의 우산에서 빠져나오 독립적으로 하나님과 계약을 했던 것입니다. 계약을 안해도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이미 계획을 하셨던 것인데 야곱은 그 계획에서 빠져 나와 자기가 인식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반응과 조건을 내걸은 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야곱과의 계약대로 그렇게 일하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시고 입을 것을 주셨으며 길에서이 위험을 당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머지 마지막 약속을 위해서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때 나타나실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벧엘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가라사대 네 눈을 들어 보라 양떼를 탄 수양은 다 얼룩무늬 있는 것 점 있는 것 아롱진 것이니라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창31:11-13)


이것이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이십니다. 서원을 상기시키십니다. 더 이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 ‘벧엘의 하나님’으로 야곱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이 얼마나 인생에게 힘든 일입니까? 야곱은 약속된 것 이외의 모든 것은 자기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계약 안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나머지는 야곱의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하는 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남들보다 백배나 더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는 모든 일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해야 했습니다. 야곱을 피곤한 삶을 살게 그냥 두셨습니다. 계약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행위 아래 있게 그냥 두셨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요셉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서 스스로 표현 했던 말처럼 말을 했던 것처럼 “험악한 세월”(창47:9)을 보내게 됩니다.

아내 라헬을 얻으려고 삼촌 라반에게 7년을 봉사했는데 막상 첫날밤에 라헬의 언니인 레아가 속이고 들어왔습니다. 라반에게 속은 것입니다. 다시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더 봉사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라반은 야곱의 품삯을 열 번이 속였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꾀를 부려 재산을 불려 나가자 라반의 태도가 달라졌고 이에 위협을 느끼고 도망해야 했습니다.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들을 자기에게 이끌고 옵니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야곱은 오랬동안 이 문제에 대한 눌림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얍복강에서 죽음 같은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환도뼈가 탈골되어 평생을 절면서 살게 됩니다. 세겜에서 살 때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고, 결혼을 빙자해 세겜에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야 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라헬의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삶의 낙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후에 다시 찾아서 부활한 아들처럼 맞게 되지만 야곱은 그때까지 험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에게 없었던 험한 삶이다. 아브라함의 우산 아래 있었으면 없어도 될 일들을 겪으며 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꾀가 많아 그 꾀를 의지하고 살았지만 실제 삶을 참으로 피곤하고 험한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게 꾀가 많게 살았던 야곱이지만 야곱의 생애에서 전적으로 은혜가 필요한 사건이 생겼습니다. 자기 행동으로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순수한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할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형 에서를 만나 죽임을 당할 것 같은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자기 형 에서를 만나야만 하는데 죽을까봐 두렵습니다. 성경은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 에서가 사백인을 데리고 자기에게로 온다고 종들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니 ‘벧엘의 하나님’이 소용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기억나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죽게 되었을 때쯤에야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죽음 앞에 섰더니 그 동안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으로는 그 일이 해결이 되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불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은 자기를 대접하신 것 같지 않게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대접하셨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끄집어냅니다. 이제 잠시 아브라함의 우산 속에 들어갑니다. 이제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조건부였지만 이제는 순수한 은혜만을 필요로 하게 되었습니다.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가로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 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정녕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창32:6-12)


야곱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를 때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을 부릅니다. 이때는 벧엘의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지금 벧엘의 하나님으로는 이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야 말로 진정한 은혜가 필요할 때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야곱은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심히 두렵고 답답함이 그의 삶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자기 힘으로 해야 했습니다. 인내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환도뼈가 위골 되는 고통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죽음과 같은 싸움의 기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이런 기도를 했다는 것을 읽어 본적이 없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 노력으로 시작했으니 은혜도 자기 노력으로 받아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야곱이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장소, 이 장면에서 야곱은 자기의 꾀로 하나님을 따르던 모습이 무너집니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에 환도뼈가 위골되었습니다. 분명한 증거가 남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야곱은 다리를 절었는데, 다리를 절을 때마다 그가 은혜의 하나님을 발견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야곱에게 있어서는 계속 벧엘의 하나님입니다.


입다의 서원

사사기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거저 주실 것을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야곱과 같이 서원 하는 입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웃의 암몬 족속이 침범을 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입다에게 임했습니다. 사사기에 늘 그렇듯이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지 아니하시고 필요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으셔서 전쟁에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입다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입다는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신뢰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원을 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자기 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서원하라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먼저 이기면 누군가를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겠습니까? 아닙니다. 입다 자신에게서 나온 생각입니다.


“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들에게로 나아갈 때에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게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삿11:29-31)


이제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데 자기 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사람이 무남독녀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나온 것입니다. 입다는 이를 보고는 자기 옷을 찟으며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사랑하는 딸을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서원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 안에 있으면 되었는데 스스로 믿음이 없었음인지, 아니면 승리할 것을 믿지 못해서인지, 정말 이기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랬는지 하지 않아도 될 서원을 하고 만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축복에 머물러 그 은혜를 누리면 되었는데 자기 스스로 하나님과 계약 관계를 성립한 것입니다. 서원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번제로 받으려고 전쟁을 이기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번제로 드리지 않아도 전쟁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면 무엇인가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 십일조를 받으시려고 야곱에게 은혜를 베풀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값싸게 지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계약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값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는 값없이 거저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누군가가 너무 귀한 것이라 그냥은 받을 수 없다고 하여 값을 지불하려고 하면 그 은혜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귀한 선물을 받으면서 10센트라도 값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면 선물을 주는 사람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선물을 값없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되듯이 하나님의 은혜 역시 값을 지불 하지 않고 은혜로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하신 말씀중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어떤 사람으로 알았습니까? 자기가 마음이 굳은 사람이기에 하나님도 마음이 굳은 분으로 알지 않았습니까?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25:26)


하나님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을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으로 알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떠 어떠한 하나님’이면 하나님은 그렇게 행하십니다. 내가 은혜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은 나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내가 율법의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은 나를 징계하십니다. 내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알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주시고, 내가 ‘야곱의 하나님’을 알면 내 노력과 지혜로 하나님의 복을 얻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모세의 하나님’을 알면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으나, 내가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알면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뿐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이심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곱은 벧엘의 하나님으로만 섬겼을지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다 관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무조건 택하시고 아들을 주시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삭의 하나님’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그대로 받아서 그저 누리되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시험조차,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인내의 시간들조차 없이 그냥 누리게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후세에 ‘야곱의 하나님’ 도 언급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셨기에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리시고 계시는 것일까요?


‘야곱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야곱의 성품을 하나씩 하나씩 꺾으셔서,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도록 굴복시켜나가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계약, 서원을 했습니다. 야곱은 라반과 헤어질 때 하나님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자기 계획도 짜고 하나님께 기도도 했습니다. 야곱은 늙어서도 가장 사랑하는 요셉을 잃었습니다. 야곱은 끝까지 자기의 육신을 버리지 못함으로 인한 고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험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되도록 그냥 내어버려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어떠한 성품으로 이해하던지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야곱이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야곱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이 체험한 하나님의 성품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동일하게 일하신 하나님의 성품이십니다. 선택해서 축복하시기도 하시지만 그들을 험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성품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야곱처럼 우리가 만난 ‘벧엘의 하나님’으로 머물러 있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의 어떤 한 부분만 아는 하나님, 하나님의 성품이 아닌데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을 고집하면서 ‘벧엘의 하나님’만을 섬기는 일 말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말을 믿고 그 사람의 경험을 토대로 그 사람이 섬기는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섬기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역시 벧엘의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우산 아래에서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마치 아브라함 밑에 있는 모든 자녀들이 그 은혜를 믿고 누리면 되는 것 같이 말입니다. 이삭은 실제로 그 은혜를 의심 없이 받아 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고난과 시련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축복, 그 은혜 속으로 몰아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면서 한편으로는 그 은혜의 우산 밖으로 나가 있는 사람들을 몰아서 그 은혜 안으로 넣으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해들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내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나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섬기고 있는가?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처음 하나님을 경험한 ‘벧엘의 하나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이 땅에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성품을 원만히 체험할 때에 고집에 묶여 있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교통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성령으로 충만한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후에 사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우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아브라함의 우산에 들어가서 복을 누리면 되는 것과 마찬가지 그림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거듭났다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하나님을 누리면 됩니다.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산에서 빠져 나와서 하나님과 따로 계약을 맺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합니다.(호4:6)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우산 밑에 거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그 충만한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야곱이라고 부르십니다. 맞습니다. 모두 다 야곱의 12아들로 이루어진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부를 때 지렁이라고 부르십니다. 지렁이는 무뇌충(無腦蟲)으로 알려 졌습니다. 야곱이 그렇게 꾀를 많이 부리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꾀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렁이가 꾀를 부려봐야 얼마나 부리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지혜가 마치 그렇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O worm Jacob)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사41:14)


예수 그리스도의 우산, 은혜의 우산에서 벗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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