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of God
하나님의 임재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10 (일)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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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하나님의 임재(14) 애굽, 광야, 가나안의 예배

애굽, 광야, 가나안의 예배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굽과 광야, 그리고 가나안의 여정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마치 그림을 보듯이 볼 수 있다. 애굽의 삶은 마치 구원 받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광야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훈련, 그리고 가나안은 그리스도인의 기업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갈 때는 맺고 끊음이 확실했으나 광야에서 가나안은 맺고 끊음이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훈련 받은 믿음과 하나님을 닮아간 성품이 가나안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광야로 이끄신 목적과 가나안으로 이끄신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며 그 역시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대비해 볼 수 있게 된다.


예배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볼 때, 지금 우리 예배의 현주소를 알기 위해서서 이스라엘이 행했었을 예배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을 것이고 광야에서는 물론이며 가나안에서도 예배했다. 그러나 그 예배할 때의 신분이 달랐고, 장소가 달랐으며, 예배의 내용이 달랐고, 예배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도 달랐다.


애굽에서의 예배는 어떤 예배가 가능했을까?

애굽에 있을 때는 애굽의 지배하에 있다. 매일 종살이를 하며 끌려 다닌다. 기도하는 것은 늘 애굽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애굽을 섬긴다. 자유를 얻어 보려고 애굽과 싸움을 해보려 하기도 한다. 그러려면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의 힘과 조직력으로 탈출해 보려고 한다. 자기들 힘으로 도저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그러니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하나님만 바라본다.


이들은 모였을 때 어떤 예배를 했을까? 어떤 찬양을 택해서 했을까? 어떤 기도를 했을까? 그 예배가 기쁨의 예배였을까? 아니면 장례식 예배 같았을까? 이들에게 예배는 축제이니 기뻐하라고 하면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할까?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애굽의 세력을 깨뜨리고 그 힘을 무력화 하시는 하나님이 능력이다. 죽음의 사자가 덮쳐올 때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어린 양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해방이다.

애굽의 삶은 구원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세상과 그 세상을 지배하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다. 죄와 사망과 욕심의 종이 되어 끌려 다닌다. 죽어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이다. 구원이다. 거듭남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다 하셨다. 사단의 세력을 십자가에서 승리하였고,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이미 준비되었다. 이제 이 사실을 믿고 해방 받으면 된다. 해방시켜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신 사실을 믿고 구원 받아야 한다.


홍해를 건너면 찬양하지 말라고 해도 찬양을 하게 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속으로부터 찬양이 나오게 된다. 찬양을 축제처럼 하지 않는다고 율법적으로 지시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에 찬양의 조건이 있어야 찬양을 하는 것이다. 만일 애굽에 있는 사람들에게 찬양을 열심히 하면 구원을 받을테니 찬양을 하라고 하면 틀린 말이다. 잘못된 예배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선물을 마련하셨는데 그 선물을 받지도 않는 엉뚱한 사람이 감사합니다 하면 우습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감사를 하는 것이다.

애굽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어떤 재앙으로 어떤 세력을 부수셨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부분이 묶였는지를 알고 그것으로부터 자유하면 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알아 그 모든 부분에 대해 자유해야 한다. 우리의 죄와 허물,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 그리고 우리가 받은 상처를 위해 죽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방과 치유와 자유를 누리는 것은 우리의 권리다. 이미 이루신 일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해방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필요하다.


애굽에서의 예배는 죽은 예배다. 신약으로 말하면 영이 없는 예배다. 거듭나지 않았으니 영이 없다. 영이 없으면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예배를 한다고 하면 그것은 대부분 복을 구하는 구복(求福)예배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종교일 뿐이다. 종교는 신을 위해서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도 열심히 예배한다. 복을 위해 열심히 예배한다. 어쩌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보다 더욱 열심을 낼 것이다. 헌금도 누구보다 열심히 낼 것이고, 봉사도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 찬양을 하라면 열심히 할 것이고 손을 들고 하라면 누구보다 손을 높이 들며 할 것이다. 복을 위해서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예배 할 뿐이다. 이것이 애굽에서의 예배의 특징이다.


광야에서의 예배는 어떤 예배가 가능했을까?

광야는 하나님의 방법과 인간의 방법의 충돌지점이다. 옛 생명에서 새 생명으로의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 영으로 육신을 지배하지 않으면 육신이 영을 이기는 때이다. 애굽으로부터 자유를 받았으나 믿음대로 살아야하는 삶에 적응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애굽을 그리워한다. 먹을 것, 마실 것, 가야 할 길을 인도해 달라고 기도한다. 육신을 죽이고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날마다 자신과의 싸움이 일어난다. 날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싸움을 해야 한다.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들을 인간적인 힘으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길은 척박하고,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어떤 일이 준비되어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고 모자란 듯하다.


이들은 모였을 때 어떤 예배를 했을까? 어떤 찬양을 택해서 했을까? 어떤 기도를 했을까? 그 예배가 기쁨의 예배였을까? 아니면 장례식 예배 같았을까? 이들에게 예배는 축제이니 기뻐하라고 하면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했을까?


이들의 예배는 공통적으로 마음이 하나가 되는 부분이 있고 둘로 마음이 나뉘는 부분이 있다.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해방에 대한 감사함이다. 구원에 대한 감사함이다. 거듭났다는 것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데 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감사하다. 그들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다.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이 건넌 홍해에서 수장되는 것을 본 이스라엘은 드디어 찬양이 터졌다. 그 큰일을 행하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했고, 그 능력이 다름이 아니라 자신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에 감사해서 찬양했다. 모든 사람의 찬양의 시작은 여기에서부터이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에서 해방되었고 홍해를 통해 세상과 결별한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고백을 한다. 동일한 감사가 그 마음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함과 찬양을 들고 나간다. 선지자 하박국의 고백처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합3:17-18)하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둘로 나눠지게 된다. 홍해를 건너서 사흘 길을 갔는데 물이 없었다. 겨우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할 물이었다.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본지 이제 겨우 사흘이 지났다. 그런데 벌써 불평이 나오기 시작한다.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반응이 있다. 한쪽은 불평을 택하지만 한쪽은 하나님을 신뢰한다. 한쪽은 염려와 근심과 걱정으로 살지만 한쪽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쪽을 택한다. 이 모든 시련을 통과한 후에 정금같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지금 이 어려움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름다운 기업이 있을 것이라는 믿는 믿음으로 찬양한다. 이루어 진 것에 대해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도 찬양한다. 그들은 이미 애굽과 홍해에서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들도 믿는 것이다.


이것이 광야 예배의 마땅한 태도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상황에 굴복 당한다. 이 상황들을 이기지 못하니 기쁨이 없다. 즐거움이 없다.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이들의 예배는 물과 기름처럼 분위기가 나뉘게 된다. 삶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예배는 형식이 되어 갈뿐 감동이 없다. 기뻐하자고 해도 흥이 나지 않고, 춤을 추자고 해도 어깨가 올라가지 않는다. 인도자가 감동과 감격의 예배를 기대할지라도 마치 네모난 바퀴를 가진 수레처럼 끌고 가기가 힘들기만 하다.


광야예배의 위험한 점은 희망이 없는 예배이다. 이제 구원 받았다. 거기에서 멈춘다. 그리스도를 통한 성장도 없고, 앞으로 받을 기업에 대한 희망도 없다. 기도는 구원 받음에 대한 감사만 있을 뿐 날마다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로 인해 배우며, 그리스도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고 그리스도로 인해 날마다 흥분된 삶을 사는 증거가 없다. 성장이 없는 것이다. 앞으로에 대한 희망이 없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려 하시는 것에 대한 기대가 없다. 그저 구원해 주신 하나만을 감사하며 평행을 산다. 구원 받은 때로부터 성장한 것이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예배가 죽는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욕심을 끊어내고, 자아를 죽이는 일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완전한 자유가 필요하며, 죽지 아니한 육신으로 인해서 생겨난 여러 가지 염려, 근심, 걱정,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죽이는 일이 필요하다. 옛 사람을 벗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작은 믿음부터 신뢰하는 연습을 하여 커다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해방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많은 말씀들이 필요하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들여보내셨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광야 40년을 돌면서 광야에서 다 죽었다.


문제가 하나 생긴다. 애굽에서 해방 받지 않는 사람들, 즉 구원 받지 않는 사람들이 광야 생활부터 시작하는 경우이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 장(場)에서 이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구원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도 삶의 어려움, 척박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사는 곳에서, 구원 받지 않는 사람들이 삶을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은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들은 이루어 진 것을 찬양하는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믿고 찬양하라고 하면 될 수가 없다. 이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으면 예배는 이 사람들로 인해서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버리고 만다.


광야의 예배는 뜨거워 질수도 있고 차가워 질수도 있는 예배다.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과 육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의 비율에 따라서 그렇게 된다. 구원 받았으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이 사람들은 애굽에서 해방을 받았으나 애굽이 좋다고 그곳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다) 애굽에서 해방되지 않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욱 세속적인 분위기가 된다. 광야 예배의 특징이다.



가나안에서의 예배는 어떤 예배가 가능했을까?

가나안은 적을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을 당하는 곳이다. 사단을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을 당한다. 해방도 받았고 믿음도 있다. 이미 약속하신 기업을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적극적인 믿음을 통해 기업을 탈취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미 시작하신 사역들 속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많이 맺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정복해 들어간다. 어떤 집을 탈취하려면 그 집의 강한 자를 먼저 묶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역의 장 속에 있는 강한 자들을 묶으며, 영적인 전쟁을 하며 사역을 넓혀 나간다. 때로는 적이 두려워 도망가기도 하고 하나님의 힘이 아닌 세상적인 힘으로 싸워 보려고 한다. 약속으로 주신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복들을 세어보니 감사할 것뿐이다.


이들은 모였을 때 어떤 예배를 했을까? 어떤 찬양을 택해서 했을까? 어떤 기도를 했을까? 그 예배가 기쁨의 예배였을까? 아니면 장례식 예배 같았을까? 이들에게 예배는 축제이니 기뻐하라고 하면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했을까?


가나안의 예배야 말로 기쁨과 감사의 예배가 될 수 있다. 애굽에서 해방되었고, 광야에서 훈련되었으며 이제 가나안에서 기업을 얻었다. 모일 때마다 찬양이고 모일 때마다 감사다. 이들의 찬양은 홍해 앞에서의 찬양이나 광야에서의 찬양과 다르다. 홍해에서는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했고, 광야에서는 앞으로 이루실 일에 대해서 찬양했으나 이제는 실제 이루신 일들로 인해서 감사와 찬양을 한다. 광야에서 그렇게 믿었던 것들의 열매를 이제 거두었다. 믿음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믿음을 심으면 열매를 거둔다.


그러나 가장 조심해야 할 때가 이때이다.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는 교만함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분의 사람들의 실수가 여기에서 생긴다. 예배가 사람이 높아지며 사람을 높이는 예배가 되어 진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아니함’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사람의 공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을 이룬 것이 사람의 힘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높아진다. 사단도 한때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때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하셨다.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5:8) 곳이다.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없으면 언제 적들의 공격이 침투할지 모르는 곳이다.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며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야 (빌2:5-8)한다.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다 마칠 때까지 믿음을 지켜야 한다(딤후4:7). 사람들이 높여주는 말과 시선에 쉽게 교만함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현대 예배의 특징이다. 우리 각자는 우리가 현재 어디쯤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복잡한 현대교회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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