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ent of God
하나님의 임재
 
작성자 김동규
작성일 2016-01-10 (일)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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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하나님의 임재(11) 지성소로 들어가는 준비

지성소로 들어가는 준비(임재를 위한 준비)


애굽에는 임재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들여보내시어 그들을 이끌어 내시겠다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커다란 능력으로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의 손에서 구출해 내셨다. 그들이 광야의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임재가 그 전의 삶과 다르게 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제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계신다. 약속이 땅은 강한 민족들이 사는 땅이다.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보다는 강한 민족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군사 훈련이 아니었다. 많은 병기들이 아니었다. 좋은 전술전략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물리치실 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강한 팔과 능력으로 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손을 들어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고사리 같은 손에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함께 할 것이다. 그러면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강한 민족들을 능히 부수고도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고사리 같은 손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강한 민족들 앞에서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들 것인가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지금 눈앞에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서 있는 이들을 향해 고사리 같은 연약한 자기의 손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롬1;17) 살아야 한다. 구원함도 믿음으로 말미암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그리스도인의 능력 있는 모든 삶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죄의 능력과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대적하는 것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보면서 믿음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믿음은 진(陣)중에 함께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온다. 이스라엘은 이제 애굽에서 빠져 나왔다. 그들이 애굽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목격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 자신들을 통해서 그 능력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지식이 없다. 모세는 경험이 있다. 자기 능력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같이 하겠다는 말씀만 믿고 애굽에 들어갔다. 애굽에 들어가서 자기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새삼 발견한다.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방법 외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말만 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아뢰며 지시를 받았다. 지시 받는 대로 믿음으로 행했더니 그 큰 일이 이루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런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그들이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되어져야 한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되며, 하나님이 말씀 한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그 능력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자기 손이 아무리 고사리 손 같아도 골리앗 앞에서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 필요한 것은 거룩함과 자기 부인이다.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죄가 없어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밀접함을 위해서 필요하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은 순종함을 위해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애굽에 있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어떤 죄 가운데 있었던 상관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그들의 정결한 삶 때문에 죽음의 사자를 피한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죽음을 면했다. 그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해방이었지 정결한 삶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이 진(陣) 가운데 계신다. 그분이 거룩하라고 명하신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지속되려면 그들이 거룩해야만 하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는 진 가운데 죄악을 없애 진이 부정하기 않게 되기 위한 많은 조항들이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이 이스라엘 진(陣)이 거룩해야만 하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안 그들은 거룩한 삶을 유지했다.


두 번째는 자기 부인이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 모두가 그들이 살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다. 광야에서 길을 내신다. 반석에서 물을 내신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온다. 전쟁을 하는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진다. 자기들의 싸움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는데서 승패가 좌우된다. 마시지 못하는 물에 나뭇가지를 하나 넣었더니 달게 되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경험하고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습관화 되었을 때 믿음으로 사는 법이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전10:4-5)해야 한다. 자기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방법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마16:24) 따르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일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를 부인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무엇을 하라고 하실 때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방법이 하나님을 막아서게 될 것이다. 우리의 육신적인 욕심이 하나님의 뜻을 반대 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일들은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들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부인하는 일,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홍해를 건너며, 세례를 받으며 우리는 우리가 죽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이제는 새 생명만으로 살겠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광야에서 실습하게 된다. 그것이 우리 몸에 습관이 되어지도록 광야에서 훈련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임재를 옆에 두고 우리는 그것이 연습되는 것이다.


이 땅에 나의 일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이 필요한가? 그것은 아직 내가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나의 일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부르심의 본을 보이셨다. 이것은 주를 위해 사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의 당연한 태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14:10)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자기 부인은 완전히 자기가 없어지신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한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사도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고백할 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로 하여금 포도나무와 가지의 원칙으로 들어가게 한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다고 하는 것이다(요15:4-5).


시편 73편에 악한 사람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실족할 뻔한 사람의 고백이 나온다. 그가 본 악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이 없이 건강하게 살며, 다른 사람 같은 고난도 없고 재앙도 없었다 한다. 그래서 그들이 교만하고 강포를 행하고,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나오고,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원하는 것보다 많으며, 거만하여 사람들을 무시하며 산다. 늘 죄를 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한 것에 대한 허무한 마음이 든다. 이 일로 인해 근심을 하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다. 그 성소에서 마음이 환해지면서 악한 그들의 결국을 깨닫게 된 것이다(시73:17). 그들은 영원한 멸망을 받을 자들이라는 사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영원한 것의 가치와 영원하지 않은 것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시각이 바뀌게 된다. 세상적인 것에 가치를 두었던 시각이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각을 획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빛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빛은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빛은 하나님의 이 땅을 보시는 시각을 우리로 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날마다 임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가치관은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변하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두시는 것을 내가 가치를 두게 되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되는 것이다. 시켜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이 일이 이루어지 위해서는 우리는 임재 가운데 거해야 한다. 임재 가운데 거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거룩함이고, 그리고 자기 부인이다.

거룩함을 날마다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깨끗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갖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몸의 깨끗함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깨끗함이 필요하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본다(마5:8). 담대함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쉽다. 그러나 인간 안에 있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자꾸 우리를 넘어지게 만든다. 목욕을 한 사람일지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발에 때가 묻게 된다. 우리는 그 더러움을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해야 한다. 우리 마음과 몸의 정결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지라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육신이다. 그렇다면 임재의 경험을 헛되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시각을 발견하고 그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꺾여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날마다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야 한다. 사건과 사건 속에서 내 방법을 뒤로 미루고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 사건속에서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지를 늘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광야생활이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기업의 땅을 앞에 두고 이 훈련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나안 땅 앞에 데리고 가셨다. 약속의 땅 앞에서 그들이 12명의 정탐군을 보냈더니 10명의 정탐군은 준비가 되지 않았고 2명만 준비가 되었다. 10명의 정탐군의 말을 더 신뢰한 백성들도 역시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제 가나안은 믿음으로 들어가고, 믿음으로 전쟁하며, 믿음으로 도성을 세워야 하는 곳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사는 훈련이 2/12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광야로 돌아가서 40년을 훈련해야 했다. 40년을 훈련한 뒤에야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시는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홍해는 갈라주셔서 건넜지만 요단강은 발을 먼저 딛어 강을 갈랐다. 여리고는 성을 7바퀴 도는 이상한 방법,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방법, 그 방법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하심이지만 결국은 우리를 위하심이다. 우리의 가치를 바꾸시고, 우리의 성품을 바꾸시며,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고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주님께 복종하는 일이다.



제단과 물두멍

눈에 보이는 성소가 있었을 때는 아무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꼭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지성소에 초청하신다. 임재를 위해 도달한 영원한 장막에 들어가면 그곳에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히12:24)가 준비되어 있다. 성소에는 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제단은 제물을 올려 태우는 곳이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보이지 않는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역시 보이지 않는 제단과 물두멍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단에서 자기를 번제로 드린다.(다른 제사들과의 관계는 다시 설명을 드려야 한다)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에배니라”(롬12:1)고 말씀하신 것처럼 ‘내 몸이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의 시작이다. 제단에 나를 번제로 드리는 것이다. 물론 실제적인 제물이 되어주신 것은 주님이시다. 우리는 그렇게 주님과 함께 죽은 존재임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산제물이 되는 것은 내가 없어지는 것이다. 살아있으나 죽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내 권리를 다 포기하는 곳이다. 내 야망과 내 나라를 다 포기하는 곳이다. 내 욕심과 내 방법을 다 포기하는 곳이다. 완전히 죽어야 한다. 제단 위의 그물은 촘촘하다. 완전히 태워야 만이 재가 돼서 밑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완전히 죽어야 한다. 조금도 살아있으면 안 된다. 자기 부인이다. 이제 무슨 말씀을 하시던지 들을 준비가 되었다. 들어갈 준비가 된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죽은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리고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한다. 몸을 주관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과 영이다. 마음과 영이 완전히 하나님께 굴복하면 몸은 자동으로 굴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산제물로 드려야 한다.


또한 물두멍이 있다. 지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더러운 것을 씻는다.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는 것이다. 물두멍은 더러움을 씻는 곳이다. 악을 깨달았으니 씻어 내야 한다. 고백함과 회개함으로 씻어내야 한다. 몸과 마음을 맑을 물로 씻어야 한다. 그래서 들어갈 준비를 한다. 거룩함이다. 이제 거룩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온전한 마음이 된다. 지성소에 들어갈 준비가 된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19-22)


그 곳에 들어가면 큰 제사장이 계신다. 이 큰 제사장은 우리의 영원한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큰 제사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도록 격려하신다. 그 일을 위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위해 찟기신 몸으로 열어 놓으신 휘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우리를 인도하신다. 휘장 안은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다.

우리는 마당에서 하나님께 나아갈 준비를 하며 지성소 전에 있는 성소에 들어간다.


진설병, 분향단, 촛대

마당에서 성소로 들어가면 그곳은 성도들의 삶과 성령의 역사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진설병은 성도들의 거룩한 삶과 그 일을 도우시는 성령님, 분향단은 성도들의 기도와 그 일을 도우시는 성령님, 그리고 촛대는 성도들의 봉사와 그 봉사를 온전케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이시다.


- 진설병

진설병이란 떡상 위에 올려놓은 떡을 말한다. 진설병이라는 의미는 ‘얼굴의 빵’을 뜻하는 말이다. 이 떡 상위에 올려진 떡은 12개로, 12지파를 상징하며 누룩이 절대 들어가지 않는 떡이어야 한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꾸며 오래 된 것은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먹어야 한다.


성소 안에 드려지는 5가지 제사가 있다. 그 중에 4가지는(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피를 흘리는 제사이고 나머지 한 가지 제사(소제)만 고운 가루를 드리는 것이다. 고운가루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자신이 삶이 으깨어져서 고운 가루가 되는 것이다. 곡식은 그리스도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한다. 이 곡식들이 같이 절구 안에서 으깨어진다. 고운 가루가 된다. 내것 네것이 없이 완전히 모두 합쳐진다. 누룩은 절대 섞으면 안 된다. 누룩은 부정한 것이다. 그 안에 누룩을 섞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기름을 부어야 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이 기름 부으심은 성도들의 삶을 주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빚게 된다. 자기가 원하는 모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름 부으시고 그 뜻대로 빚으시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산제물이 되어지는 것이다.


말라기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어떻게 더러운 자기들이 더러운 떡을 드렸냐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곡식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곡식은 깨끗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삶이 깨끗하지 않고 더러웠던 것이다. 진설병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무엇이 먹고 싶어서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깨끗한 삶을 원하신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시고 11절에서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이방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끗한 삶을 제물로 드릴 것이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먼저는 깨끗한 제물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 위에 성령께서 일하셔서 그 제물이 거룩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떡이 12개다. 이것은 12지파를 의미한다. 12개를 함께 드리는 의미는 ‘연합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말씀하신다. 히브리서에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고 말씀 한다. 연합이 주를 보는 첫째조건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가 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하신다. 곱게 빻아진 가루들을 기름을 부어 반죽을 하듯이 성령께서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연합하기를 원하신다.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더러운 떡은 거룩하지 않고, 연합되지 않은 우리의 모습니다. 진설병은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삶, 헌신된 삶, 그리고 서로 연합함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인한, 사람과 성령님의 합작이다. 이 진설병이 성소에서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 촛대

촛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감람유이다. 감람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으깨어지셔서 이 땅에 선물하시는 성령님이시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삶을 빛으로 인도하신다. 등불에는 기름이 꼭 필요하다. 등잔을 가지고 있지만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이 있었다. 그러면 불을 밝힐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를 노력할지라도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빛을 발 할 수가 없다. 혹시 빛을 비추더라도 자기를 태우는 것이지 기름을 태우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소진(burn out)되어 버리고 만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헌신을 헌신답게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도우신다. 이 땅에 빛을 밝히는 빛은 그리스도인 스스로의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촛대, 우리라는 심지를 통해 이 땅에 불을 밝히시는 것이다.


세례요한은 스스로 자신을 불태워 비추는 등불이었다(요5:35). 자신의 삶을 태워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빛을 잠시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빛은 세례요한이 비추는 빛과는 차원이 달았다. 성령께서 비추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우리의 삶을 주께 드릴 때 우리를 통해 성령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마치 세례요한이 자기를 태우면서 비추는 것과 마찬가지의 비춤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비추시는 빛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환하게 비추시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 분향단

분향단에 모아지는 것은 성도들의 기도이다(계5:8, 8:3-4절). 기도가 향기가 되어 올라간다. 기도 역시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신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가장 좋은 기도인지 모를 때가 많이 있다.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기도 한다. 우리의 욕심을 품고 기도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도우신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기도를 하신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지성소로 들어가며

이때쯤 되면 성소에 들어온 우리를 성령께서 인도하기 시작하신다. 인간의 감정과 의지와 몸은 하나님의 영에 압도된다. 이제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향로 하나 취하여 성소 안에 있는 향단에서 불을 꺼내 내가 든 향로에 채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불 위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찢어진 육체,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들어가게 된다. 예전에는 두꺼운 커튼이 있어서 아무나 들어갈 수 가 없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커튼은 찢어져 버렸다. 이제는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들어가면서 보이는 지성소의 속죄소 쪽으로 내 향로에서 나오는 향기를 가득 내어 보내서 그 앞이 연기로 가득 차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향로를 취하여 여호와 앞 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두 손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채워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레16:12-13)


하루는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33:18)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고 말씀하신다. 그래도 은혜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뒷모습은 보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한다(23).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살자가 없다. 임재해 계신 지성소에 속죄소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직접 보면 안 된다. 그러므로 많은 향기, 연기를 내어 들어가면서부터 속죄소 쪽으로 연기를 보내 속죄소를 직접 안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실 때마다 연기가 가득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인하여“(계15:8)라고 말씀하신다. 모세 때도 온 백성 앞에 임재하실 때도 구름과 연기 가운데서 임재하셨고,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를 마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모였을 때 임재하실 때도 성전 전체에 연기로 가득차 제사장들이 능히 서서 섬기지 못했다고 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출19:16-18)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대하5:13-14)


이제 우리는 보이지 아니하는 지성소에 들어간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연기로 드릴 것이 있다. 찬양과 기도다. 찬양하는 말과 찬양하는 기도다. 그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찬양이다. 그러므로 모든 찬양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는 찬양의 제목이 생긴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속죄소, 하나님의 보좌 앞에 찬양의 향기를 드리게 된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13:15)


계시록에서 찬양하는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일들을 찬양한다. 이것이 진정한 찬양의 제목이 되는 것이다.


“...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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